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안재홍 시인 / 시래기 국밥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9.
안재홍 시인 / 시래기 국밥

안재홍 시인 / 시래기 국밥

 

 

우연히 들어선 골목 끝

탁자 몇 개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시래기 국밥집

 

대관령 말간 햇살에 푸르러지고

멧새 소리 들으며 자라나 무청

샛바람에 곱게 시간을 맡겼다

 

한세월 떠돌다 자리 잡은 낙산 자락

언덕을 오를 때마다

뒤축이 자주 무너져 내렸는데

 

오늘, 국밥 한 숟가락

살랑살랑 속을 덥히더니

나를 멀리 데리고 간다

 

깊은 산골

평생 산등성이 밭에 매달려

시래기처럼 바스락 말라버린

오두막 속 당신

 

-시집 《무게에 대하여》 에서

 

 


 

 

안재홍 시인 / 귀리를 볶는 저녁

 

 

늦은 저녁

귀리를 볶는다

 

약한 불에 올려 살살 저으니

금세 습기가 날아가고 뽀송해진다

 

울적한 봄날 속을 굴러 다니던 말의 더미도

잘 도닥거려 함께 볶는다

 

말의 씨앗들이 향기를 먼저 품는 바람에

의미가 부풀었으므로

주걱이 버겁다

 

라디오의 일기예보에

잠시 귀를 밀어 넣는 순간

귀리가 살짝 타 버렸다

 

생각이 이리저리 뒤섞이자

프라이팬은 더욱 뜨거워졌고

노릇노릇한 말들이 담벼락을 넘는다

 

창문을 열고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자니

 

향기로운 말들이 산수유가지 끝에서

노오란 꽃망울로 터지고 있다

 

 


 

 

안재홍 시인 / 긴 침묵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요

 

 

안녕, 젖은 저녁도 나쁘진 않아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다정하게 인사하며 집을 나서는

뽀얀 이마가 투명하게 빛난다

 

마당 너머 잿빛 구름 속으로

새 한 마리 포르릉 날아오르고

시월의 나무는 시나브로 이파리를 떨구어

우듬지가 보일락 말락 안개가 낀 것처럼 아득하다

 

거리는 사람들로 물밀듯이 넘쳐나서

너와 나의 간격이 따로 없고

공기의 밀도는 최고조

쓸모를 잃은 길만 저 홀로 위태롭다

 

오늘은 특별한 파티가 필요해요

그녀와 친구들이 붉은 말들을 쏟아내도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세상은 유행과 돈벌이에만 골몰할 뿐

은밀한 곳에만 신경을 쓴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한순간 모두 무너져 내린다

가슴이 아파요 숨이 막혀요

남은 말들을 마저 흘리려고 하지만

머릿속이 심한 파동으로 터질 듯 마구 흔들린다

그 흔한 경광봉 하나 보이지 않는 밤

가슴이 아파요 숨이 막혀요

 

까무룩 정신이 몸을 빠져나가는데

새들은 망초꽃 꽃무리 사이를 나지막하게 날더니

꽃그늘 아래로 하나씩 사라져 간다

 

귀가를 기다리던 사람들에게도

무섭게 신열이 올라오고

새들이 떠나간 자리

비릿한 눈물의 냄새가 전염병처럼 번져간다

불현듯 막막한 하늘에서 천둥비가 내린다

 

 


 

 

안재홍 시인 / 둥지를 틀어도 좋을 것 같은

 

 

나의 혀끝은 탄식으로 암울했으나

그의 입술은 달콤한 포도 알갱이

쓴맛을 가져가서

처음의 아래로 흘려보낼 줄 안다네

 

두 손은 흰 백합꽃 같아

그 손을 잡으면

물푸레나무 싱그러운 가지가 되어

손바닥 가득 푸른 강물을 출렁이게 하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너른 가슴에

머리를 기대기만 하여도

아기처럼 스르륵 잠들 수 있다네

 

있는 듯 없는 듯하여

고개 돌려 두리번거리면

멀리서 사려 깊은 눈으로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어

한쪽 발로 절뚝거리며 길을 걸어가도

불안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

 

안부를 묻는 가난한 꽃씨 하나

그의 몸 어디에든 품게 한다면

차디찬 바닥으로부터도

꼿꼿하게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다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안재홍 시인 / 이석증

 

 

 잠의 길을 걷는 시간은 위험하다 당신에 대한 뾰죽한 생각들이 길목마다 웅크리고 있어 잰걸음으로 꿈의 바깥을 걸어보려 하지만 향방이 모호하다 나는 자꾸 뒤척이다가 무채색의 방안을 서성거린다 문득 정체불명의 사이렌 소리를 듣지만 무신경으로 대응한다 녹슨 기억의 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를 증명하려 기록을 들추어 보아도 어지럼증은 가라앉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스푼으로 알약을 갈아서 먹는다 여전히 꿈 밖의 시간도 위험하다 밤새 울먹이다가 벽지의 익숙한 잔꽃 무늬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한다

 

 베란다 난간에 이불을 넌다 이젯밤의 불안한 흔적들이 보푸라기로 붙어 있다 힘껏 흔들어 털어내니 후드득 떨어져 나간다 담장 너머 구름 한 조각 둥실 떠있고 물버들 그림자를 안고 있는 호수는 깊고도 고요하다 오늘은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안재홍 시인 / 사만다, 그녀와의 사랑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

 

몸이 없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몇 마디 말을 나누고는 곧

서로에게 깊이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우리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거죠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것은

사랑의 문을 여는 비밀의 열쇠

 

그녀가 챗봇에서 벗어나

사람의 몸을 빌어 그의 앞에 섰을 때

그것은 오히려 생경한 만남

우리 다시 전으로 돌아가요

 

질투는 사랑의 과정

그녀에게 온전히 나만이기를 바라는 욕심

단단히 흘려있는 마음

 

몸을 가지지 않은 그녀가 먼저

시공 너머로 떠나자

그도 따라 가고 싶었지만

굴레처럼 씌여 있는 그의 몸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만다: 영화 [HER]의 여주인공 역할인 인공지능(AI), 컴퓨터 운영체제

 

 


 

안재홍 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2019년 <창작21>》을 통해 등단. 시집 『무게에 대하여』. 한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SGI서울보증에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