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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영미 시인(부산) / 부라더 미싱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9.
김영미 시인(부산) / 부라더 미싱

김영미 시인(부산) / 부라더 미싱

 

 

 미싱을 돌린다

 실꾸리에서 나를 풀어 윗실에 건다

 북집에다 그를 넣고 밑실을 당긴다

 피륙 열 두 폭에

 하루와 이틀

 두겹으로 포갠다

 누비 박는다

 

 위로 박고 아래로 박는다 언덕을 박고 산을 박는다 파란 나의 손톱과 노란 그의 발톱을 박고 그의 이십대와 나의 삼십대를 박는다 그가 타고 다니던 버스 정류소와 내가 통학하던 강나루를 박고 물고기 한 마리 색실로 수를 놓는다 그가 자취하던 스레트지붕과 내가 살던 단칸방을 누비 박고 가슴 봉분에 목단꽃 이파리 활활 날개짓을 박는다 나의 사월 사일과 그의 칠월 칠일이 밑실에서 엉켰다 윗실이 끊어졌다 한 벌뿐인 옷 아귀가 틀어졌다 칡넝쿨로 얽힌 아랫단을 잘라내고 보푸레기 뜯어낸다 그를 뜯어낸다 색실을 풀고 물고기 저홀로 바다로 간다 가면서 긴 여름해 나를 박는다 오후 세 시 권태가 무료를 박을 때 왼쪽으로 목단꽃 지고 오른쪽으로 나비 날아간다 가문비나무 한 땀 한 땀 뿌리를 내린다 누비 박는다

 

 스무날 하현

 초여드레 상현

 상처를 포갠다 보름달 둥글게

 누비 박는다

 

 


 

 

김영미 시인(부산) / 수면도(睡眠圖)

 

 

 문득 몸이 붓이란 걸 알았다 내가 잘 동안 이부자리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몸을 가지런히 하고 아침까지 정하게 잔 날은 곧은 대나무 그림 한 폭을 얻었다 옆구리를 세워 칼잠을 든 날은 일어나 보면 이부자리 한 켠에 베일 듯 난이 절벽을 뛰어내리고 있었다 매화 국화 때때로 새나 나비를 친 날도 있었다 요즘은 몸과 마음이 어긋나서인지 뿌리에서 가지에서 자꾸 토막이 나곤 한다 서너 개 탈골한 꿈을 깁느라 빗소리에 바람소리 분주한 날은 날개며 꽃잎 다떨어져 분분히 어지럽다 머릿속 잡풀더미를 쳐낼 겸 오늘은 햇빛 질퍽한 들길을 오래 걸었다 새가 날개를 그리며 날고 있었다 목련 꽃봉오리 붓끝에 힘을 주고 있었다 빈 허공이 花鳥圖 한 폭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만나는 시각, 별똥 하나가 하늘을 죽 그어내렸다 품이 넓은 오동나무 그림자는 장미농원 울타리를 타고 올랐다 달빛만이 내 잠길을 걸어나가리 붓결을 따라 고르게 숨을 포갠다 격자창 가지런히 달빛 무늬를 치듯 이부자리 가득 달빛 수면도 그리고 나는 긴 여백

 

-「현대시」2004년 8월호

 

 


 

 

김영미 시인(부산) / 내가 아는 김 그리움씨

 

 

내가 아는 김 그리움씨는 딱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오

미루나무처럼 키가 크고 팔 또한 몹시 길다오 강나루에서

연꽃마을로 가는 사이에 살며 가끔은

지나가 버린 날에도 산다오

 

그가 태어나던 날

나는 몸보다 마음이 낮아 습지에 엎드려 있었는데

갈대 허리를 꽉 붙들고 있었는데

서걱서걱 바람소리에 숨어 지네와 전갈

내 몸 속을 기어다니기 시작하였다오

 

목금座인 그는

대장장이 마을에서 작살을 굽기도 하고

빗줄기 마을에선 그물을 엮기도 했다오

타고난 그의 사주에는 물불이 성하여

꽃불 번져가는 봄날이면 살구나무에 걸터앉아

휙휙 작살을 날리기도 하고

핏줄처럼 붉어지는 제 몸에 불을 붙여

우체통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오

 

곳곳에

그가 쳐놓은 그물이라

간이야 심금이야 다 빼앗겨버린 나는

마음도 없이 떠돌며 그저

지나가는 무심한 바람에나 기댔다오

 

언제부터인가 그의 등에는 양떼구름이 박히고

가슴에는 강물의 지도가 숨어들어

해질녘이면 한아름 붉은 석양을 안고

엉금엉금 내 안으로 기어든다오

 

내가 아는 김 그리움씨는

또한 활엽수처럼 몸이 얇기도 하여

바람이 숭숭 뼈를 열고 지나간다오 그가

내 안에 진을 친 지 오래

 

아침이면 나보다 먼저 일어나 활통을 맨 채

식탁을 서성거리고

밤이면 어느새 먼데 불빛이 되어 내 뒤를 밟는다오

황소, 고래, 하늘 나라 왼갖 짐승을 다 풀어

밤새도록 내 뒤를 쫓고 또 쫓는다오

 


 

 

김영미 시인(부산) / 의자

 

 

허공에 의자가 있다

아무도 의자라 부르지 않는

의자가 있다

의자에 앉은 햇빛이 감전사하고 있다

의자에 앉은 바람이 떨고 있다

허공에 의자가 있다

의자인줄 모르는 의자가 있다

의자 옆에 안테나가 있다 그 옆에

십자가가 있다

꼬리연이 감겨 있다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다

허공에 의자가 있다

비를 맞는 의자가 있다

저기압에서 고기압으로

안개 속을 헤매는 의자가 있다

끊임없이 산과 들을 넘는

의자가 있다

허공에 의자가 있다

매달린 의자가 있다

낭떠러지인 의자가 있다

움켜잡아야만 하는 의자가 있다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의자가 있다

걸어다니는 것의 의자는

지상에 있다

날아다니는 것의 의자는 공중에 있다

내가 같이 앉을 수 없는

의자가 있다

 

 


 

 

김영미 시인(부산) / 피타고라스의 소묘

 

 

방에 방이 앉아 있다

수평과 수직이 만나 벽을 만들고

짧은 가로와 짧은 세로가 액자를 건다

큰 높이와 작은 높이가 장식장을 세우고

작은 높이가 탁자를 놓고 마주앉는다

 

그 위에 크리넥스 한 통

차곡차곡 접혀진 직사각 안에

차곡차곡 쌓여진 공간들

가로에 끌려나오던 세로가 주춤거린다

세로에 끌려나오던 높이가 머뭇거린다

주춤과 머뭇이 빚어낸 꽃

일없이 피었다

 

분홍빛 자벌레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가득 방바닥을 기어다닌다

가로는 수평으로 거닐고 높이는 수직으로 오른다

앉을 것은 앉았다 설 것은 섰다

자리와 노선이 없는 것들

오른쪽 모서리 쓰레기통 속으로 날아간다

 

둥근(圓)이 되기에는 너무 모난 것이

곧은(線)이 되기에는 너무 비뚠 것이

점이 되기에는 양껏 비대한 것이

구가 되기에는 영 한쪽이 기우뚱한 것이

 

선이 지워지고 면이 잠식된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중심과 축이 없는 것들

왼쪽 모서리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진다

 

아무도 없는 방

둥근 손잡이가 문을 잡고

쌍방향으로 물음표를 찍고 있다

 

 


 

김영미 시인(부산)

부산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불문학과. 1998년 《시와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비가 온다』. 2004년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부산 작가회의 회원이며 '시와 사상'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