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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귀선 시인 / 미필적 고의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배귀선 시인 / 미필적 고의

배귀선 시인 / 미필적 고의

 

 

역전갈비집 앞을 서성인다

가슴께를 더듬는 습관,

그늘진 골목에 가래침 뱉듯 외면하는

당당함은 한나절이 가기 전 객지에서

길 놓친 저물녘이다

두고 온 휴대전화로부터 멀어질수록 커지는 두려움

노숙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축 번호를 해독하는 일이라서

태종태세문단세.........

나랏말싸미 듕귁에............

의식의 반복을 놓아버린 그 어디쯤

기억은 뒷모습을 보인 지 오래

문명이 문맹이 되는

생의 거치대에 서서 남루를 꿈꾸지만

여전히

삼거리 신호등에

길들여져야 한다

 


 

배귀선 시인 / 가을소나타

 

 

가슴에 머문 시

한칸한칸 채우다

눈물 핑 돌아

질끈 눈을 감았다

 

여름햇살처럼

한 때 뜨거웠던 사랑

두터운 그리움으로

가슴에 길을 내었다

 

흐린 오후

파스텔톤 거리엔

가랑잎 지는 소리와

차가운 가을비의 추적임

넓어진 내 뜰에도

가슴 속 길을 묻는 또 다른 내가 있어

 

허물처럼 벗어놓은 세월

발밑에 내려놓고

아름다이 떠나는 계절

마음 하나두고왔다

 

 


 

 

배귀선 시인 /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그리움 가득 담은 가을편지에

코발트 하늘 실어 보내고 싶다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누구에게라도 사랑고백 담은

색 고운 가을엽서 띄우고 싶다

 

내게도 간절한 시간이 있었음을

 

길가 코스모스 볼을 부비고

우체국 지붕 위 내려앉은 파란 하늘

찬란했던 여름이 지고 있다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되뇌이는 말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배귀선 시인 / 누수

 

 

똑똑, 어둠이 샙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수압이 밀어낸

적막 한 방울, 소리를 밀어내는 허공으로

밤 내 쌓인 침묵이 돕니다

 

화장실의 흩어진 슬리퍼

왼쪽과 오른쪽의 거리를,

언어가 되지 못하고 널브러진 활자들을

독백처럼 수리하는 밤

 

상처가 상처를 보듬는다는

맹탕 같은 상상으로

고독을 오독해 보는 것인데

 

그대, 들리나요?

막아도, 틀어쥐어도 새는 소리

 

-월간 <현대시 2022년 2월호

 

 


 

 

배귀선 시인 / 석양을 줍다

 

 

가로수 그늘 뒤집어쓴

빨간 조끼 서넛, 종량제 봉투처럼 바스락거린다

 

늦봄 꼬리까지 얹어

저울에 달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세월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얼마나 침을 모아야 침묵이 되는가

 

혀 밑을 갈근거리는 굽은 살구나무

무릎을 펴면 닿을 것도 같은

시큰한 가지와 가지 사이

서쪽 하늘 넘어다본다

 

아직 몇 매달려 있는

살구 알 같은 노인의 집게에 집혀

쓰레기봉투에 담기는

 

찌그러진 석양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배귀선 시인 / 셔틀버스

 

 

이윽고

기울어진 사람들

줄지어 내리는 용산역 앞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축하는 고장 난 소리에

사람들은 바쁘게도 길 터줍니다

 

기차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광장을 메운 건강한 소음과 겉도는 병색이

환자복에 가려졌던 헛헛함 부추겨

콩나물국밥집을 찾아듭니다

 

팔팔 끓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식이고

먹을 만한 뜨끈함에 밥을 만 것은 남부식이라고

내 행색 더듬는 쥔네 말에

헐렁한 바지 속 식어 버린 오줌주머니를

자존심으로 추켜 올립니다

 

병원 밖이 모두 천국인 듯 의자 당겨

뜨거움과 따스함 사이에서 망설일 때쯤

건너편 탁자에 나보다 더

기우뚱한 아들 앞에 앉힌 노부

병원 버스 타는 곳을 묻습니다

 

허벅지에 매달린 오줌주머니를 들킨 것 같아

약봉지 삐죽한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서둘러 팔팔한 전주식 한 수저 떠 우물거리며

보란 듯 허리를

곧게 펴 보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배귀선 시인

1960년 전북 부안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평론가. 수필가. 2011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와 《영화가 있는 문학의 오늘》로 등단. 연구서 『신춘문예당선동시연구』, 시집 『점멸과 침묵 사이』, 수필집 『그리움 쪽에서 겨울이 오면』. 원강대학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