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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귀선 시인 / 미필적 고의
역전갈비집 앞을 서성인다 가슴께를 더듬는 습관, 그늘진 골목에 가래침 뱉듯 외면하는 당당함은 한나절이 가기 전 객지에서 길 놓친 저물녘이다 두고 온 휴대전화로부터 멀어질수록 커지는 두려움 노숙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축 번호를 해독하는 일이라서 태종태세문단세......... 나랏말싸미 듕귁에............ 의식의 반복을 놓아버린 그 어디쯤 기억은 뒷모습을 보인 지 오래 문명이 문맹이 되는 생의 거치대에 서서 남루를 꿈꾸지만 여전히 삼거리 신호등에 길들여져야 한다
배귀선 시인 / 가을소나타
가슴에 머문 시 한칸한칸 채우다 눈물 핑 돌아 질끈 눈을 감았다
여름햇살처럼 한 때 뜨거웠던 사랑 두터운 그리움으로 가슴에 길을 내었다
흐린 오후 파스텔톤 거리엔 가랑잎 지는 소리와 차가운 가을비의 추적임 넓어진 내 뜰에도 가슴 속 길을 묻는 또 다른 내가 있어
허물처럼 벗어놓은 세월 발밑에 내려놓고 아름다이 떠나는 계절 마음 하나두고왔다
배귀선 시인 /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그리움 가득 담은 가을편지에 코발트 하늘 실어 보내고 싶다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누구에게라도 사랑고백 담은 색 고운 가을엽서 띄우고 싶다
내게도 간절한 시간이 있었음을
길가 코스모스 볼을 부비고 우체국 지붕 위 내려앉은 파란 하늘 찬란했던 여름이 지고 있다
가을우체국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되뇌이는 말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배귀선 시인 / 누수
똑똑, 어둠이 샙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캄캄한 수압이 밀어낸 적막 한 방울, 소리를 밀어내는 허공으로 밤 내 쌓인 침묵이 돕니다
화장실의 흩어진 슬리퍼 왼쪽과 오른쪽의 거리를, 언어가 되지 못하고 널브러진 활자들을 독백처럼 수리하는 밤
상처가 상처를 보듬는다는 맹탕 같은 상상으로 고독을 오독해 보는 것인데
그대, 들리나요? 막아도, 틀어쥐어도 새는 소리
-월간 <현대시 2022년 2월호
배귀선 시인 / 석양을 줍다
가로수 그늘 뒤집어쓴 빨간 조끼 서넛, 종량제 봉투처럼 바스락거린다
늦봄 꼬리까지 얹어 저울에 달아도 무게가 나가지 않을 것 같은 세월 마스크에 가려져 있다
얼마나 침을 모아야 침묵이 되는가
혀 밑을 갈근거리는 굽은 살구나무 무릎을 펴면 닿을 것도 같은 시큰한 가지와 가지 사이 서쪽 하늘 넘어다본다
아직 몇 매달려 있는 살구 알 같은 노인의 집게에 집혀 쓰레기봉투에 담기는
찌그러진 석양 -월간 《현대시) 2023년 7월호
배귀선 시인 / 셔틀버스
이윽고 기울어진 사람들 줄지어 내리는 용산역 앞 앞서거니 뒤서거니 부축하는 고장 난 소리에 사람들은 바쁘게도 길 터줍니다
기차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광장을 메운 건강한 소음과 겉도는 병색이 환자복에 가려졌던 헛헛함 부추겨 콩나물국밥집을 찾아듭니다
팔팔 끓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식이고 먹을 만한 뜨끈함에 밥을 만 것은 남부식이라고 내 행색 더듬는 쥔네 말에 헐렁한 바지 속 식어 버린 오줌주머니를 자존심으로 추켜 올립니다
병원 밖이 모두 천국인 듯 의자 당겨 뜨거움과 따스함 사이에서 망설일 때쯤 건너편 탁자에 나보다 더 기우뚱한 아들 앞에 앉힌 노부 병원 버스 타는 곳을 묻습니다
허벅지에 매달린 오줌주머니를 들킨 것 같아 약봉지 삐죽한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고 서둘러 팔팔한 전주식 한 수저 떠 우물거리며 보란 듯 허리를 곧게 펴 보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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