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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선우 시인 / 아모르 파티
나무는 누울 줄 안다 물은 일어설 줄 안다 나는 여태껏 의자에 앉아 있다 어느 날, 선물 받은 의자였다 새로운 것은 항상 흥미로워서, 맨몸으로 앉아 경건해진다 의자가 빗속을 떠돌아다니던 걸 목격한 적 있다 모든 것에 질려버린 거라고, 일기에 적는다 나는 의자의 자세를 한참 따라 했던 적있다 가끔 젖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축축한 것엔, 온기가 있다 나는 그래서 맨몸인 거다 돌은 죽을 줄 안다 바람은 선명해질 줄 안다 아는 것만큼 두려워지는 건 없고, 이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여태껏 의자에 앉아 있다 의자는 네 발에서 두 발로 체형을 바꾸는 중이다 자꾸 가까워진다고, 일기에 적는다
변선우 시인 / 복도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변선우 시인 / 비세계
1 세계에 구멍이 났다. 너무 많은 가시 때문에 너무 많은 구멍이…. 신께서 힘이 없어 거대한 후라 크레피탄스*를 심으시다 떨어뜨리는 바람에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버렸다. …이제 무엇이 흘러들까. 인류는 땅에다 용기를 묻고 있다. 땅콩만 한 믿음이 땅콩만큼 새겨지고 있다. 완고하던 유산들이 하나둘 가루가 되어 가는 기분…. 세계는 가장 먼저 음악을 잃었으며 유행은 도둑처럼 찾아오는데
2 바람이 쪼개지고 해가 불어온다. 하늘이 넘어지고 땅이 쏟아진다. 의사는 손목을 긋고 정원사는 목을 매다는 거다. 제정신이 자꾸만 제정신을 해산하는 거다.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시를 쓰고 있다. 분수에 빠진 생쥐와 분수에 빠진 또 다른 생쥐는 껴안는다. 분수는 정말 크고 생쥐들은 정말 작아서 방법이 이것뿐이라는 듯 껴안지만 냄새를 맡지 않는다. 후회와 모의가 없다.
믿음만 깊어진다. …시인은 시작한다.
3 나는 한 구멍에 걸터앉았다. 발가벗고 털을 뽑는다. 세계에 흩뿌린다. 인류는 굴을 파서 몸을 욱여넣고 있다. 싱싱한 땅콩이 되고 있나. 나는 마지막 남은 한 가닥까지 뽑고 있다. 알쥐가 되고 있다. 세계는 쟁취에 점령당하였다. 인류는 (육안상) 멸종하였다. 신은 이제서야 다락방과 환몽을 발명하므로 나는 넘나들고 싶은 거다. 일단 코를 후비는 거다. 엷은 안개들이 차례대로 펼쳐진다. 불처럼 번져 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무 중 하나이며, 몸통에 가시를 두르고 있다. 독성이 높은 수액과 열매의 씨앗을 자랑한다. 열매를 다이너마이트처럼 터뜨려 번식한다.
변선우 시인 / 애초
천상에서 지상으로 벌거벗은 몸들이 내려왔다 수억 년 전에 목격하였는데, 이제야 고백을 하게 되었다 검디검은 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돌았다 신나게, 더 신나게, 지상의 종種들이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더 큰 원을 그리며 돌 수가 있었다 누군가는 대지에, 누군가는 산악에, 누군가는 해양에 들어가 돌았다 원은 계속해서 커다래지다가, 더욱 빠르게 돌아가다가 폭풍이 되었다 나만 빼고 폭풍이 되었으므로, 나는 빈방에 들어가 빈 병을 제공받았다 빈 병을 휘휘 불어 보았다
나는 지금까지도 불고 있다 빈 병의 표피에 자잘한 금이 빼곡한 것이다 자꾸만 코를 파고 싶기도. 방귀를 뀌고 싶기도 한 것이다 (어제는 창밖의 거대한 파도를 목격하였다 거기에서 뻐끔뻐끔 솟아오르는 공기 방울도 보았다) 폭풍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별똥을 떨어뜨리려고, 나더러 목격하라고 있다
변선우 시인 / 울트라 바이올렛
어둠이 쌀밥처럼, 나를 깨물어 먹을 때, 싫어요, 이 말이 나보다 건강할 때. 무덤과 당신이 동의가 되고, 부엌을 창문이라 부르게 될 때. 밤은 몸을 동그랗게 만다. 무언가를 숨기며 나를 본다. 내 이름이 밤의 거기에서 꿈틀거릴 때, 눈처럼 깜빡거리는, 거기를 궁금하게 될 때, 나는 온 마음으로 희미해지고 있다. 내 등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보는 당신이 있다. 쌀밥을 입가에 묻히고 바다에 가고 싶어요. 거기서, 안개처럼 잠들어버리고 싶어요. 이런 말들이, 어둠을 까마득하게 낳을 때. 내 입이, 내 손이 어둠을 받으면 한없이 슬퍼지면 당신은, 내 속에서 여러 번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될까. 어둠은 비겁해서, 내가 사라지더라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는다. 당신은 나를 두려워해요. 이 말이, 어둠보다 비겁하게 나를 씹을 때, 나는 검은 해안가로 밀려와 쪼개지고 무너질 수 있다. 허방에 매달린, 문 열고 내 몸을 주워가는 당신이 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변선우 시인 / 인조
민달팽이는 유명을 달리한다 그것은 민달팽이의 별수 없는 현상
그 광경은 얼마간 평면적인데
인간은 다가가더니 민달팽이를 거두어 주물거리는 것이다
열심히 반죽하더니 흑토마토를 빚어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새그러운 사업 그 결과는 창가에 줄 선 흑토마토를 묘사하는 일
썰어보거나 크게, 깨물어보면 즙액과 마음은 폭발할 예정이므로
창밖에 미지근한 비가 내린다 인간은 손을 가져가 씻는다
변선우 시인 / 피스타치오 나무가 자라나는 화장실
신사용 화장실에서 피스타치오 나무가 자라나고 있었다 신사들은 나무에 둘러 앉아 담배를 태웠다 이토록 좁은 곳에 사람이 몇 명이람, 말의 가죽을 쥐고 피스타치오 나무는 자라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연기가 떠오르고 있었다 기침이 흩어졌다 신사들은 발을 한 쪽씩 들어줄 뿐, 그 때 타일이 웃었다 타일의 기차놀이 타일의 일렬종대, 어딘가로 실려가는 것 같았다 피스타치오 나무는 가운데에 앉아 피스타치오를 까먹었다 신사들이 서로의 해골을 까먹는다면? 객실 내에서도 담배는 꺼지지 않았다 손끝에 매달린 저 미소, 뿌리가 타일을 일으켰다 신사들은 입이 없었다 불평은 있는데? 영원히 줄지 않는 담배 쥐고 타일을 질겅질겅 밟아댔다 피스타치오는 붉게 자라나고, 아직 죽은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았다 이토록 좁은 곳에 신사들은 꼭 식물성처럼, 빽빽했다 누구의 근육에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뛰어내리려면 큰 용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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