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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라환희 시인 / 지문의 시간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라환희 시인 / 지문의 시간

라환희 시인 / 지문의 시간

 

 

썰물 자락에 끌리는 적벽강 못미처

시작 즈음을 왜 끝이라고 하나

의구심을 밟고 서면 이어지는 바다 혹은 땅,

 

과거와 미래의 경계는

물에 잠긴 오른발과

바위에 올라선 왼발 사이

 

설화는 입에서 굴릴수록 맛깔나지

퇴적물이 생명을 얻는 해면

드러난 첩첩의 총리에 손 뻗어

 

화석이 된 어제를 다듬는 것은

밀물과 썰물 오가는 가랑이 사이

밑을 굽어보는 일

 

육지로 기울어져 아픈 사람들은

묵은 담석을 꺼내 물수제비 뜨거나

할싹대는 소금물에 상처 씻느라

수평선이 뭉개지는 것을 보지 못하지

 

불투명한 시작이 연인의 혀끝에서

마시멜로로 끈적이는 저물녘

리셋된 기억이

붉은 녹물 흘리는

 

곶이면서 만인 조간대

침식의 틈, 바위 하나 들어 올리면

납작게처럼 달아나는 이야기들

 

숲이 된 네가 있고

거기

백악기 미생물폼의 흔적 하나

지구의 지문을 따라 돌면

손바닥 안

 


 

라환희 시인 / 마스크 워크

 

 

그녀는 언제나 뒤에 서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진부함을 뚫고 나와 등 뒤에서 물끄러미

15도 기울기 목이 기형으로 보이는 여자

꼭 배후를 속속 캐보겠다는 자세다

 

머리를 빗는다 비듬처럼 떨어지는 삼류

일상을 비웃듯 일찍 죽어 아름다운

화가의 그녀, 그려진 벽은 견고하고

거울 속 여자는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다

동자 없는 눈이 주시하는 거울

 

극치가 눈에 이른 그녀를

화가는 응시 없이 사랑했을 거라고

스마일 라식을 하고 돌아와

비누 거품으로 눈을 가린다

 

각각의 초점 숨긴 식구들이

주말 드라마를 펼치는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속

차려입은 가족 틈에서 목이 기울어진다

 

참도 거짓도 아닌 클리셰 클리셰

눈동자가 어딘지를 향하는지 알 수 없어

대사 없는 거울이 각본이 되는

 

- 계간 《시사사≫ 2022년 가을호

 

 


 

 

라환희 시인 / 몽상 직구

 

 

소분해서 파는 상상을

형상으로 주문했어요

 

오리발의 모양을 하고 도착한

자기최면은 부력과 같아서

방향을 모르고

 

수영강사가 지켜보는 것은

걷는 물고기 혹은

부레가 있다고 믿는 고양이와 나

왈칵,

 

250일 만에 양수를 쏟지 않았다면 지느러미를 가졌을까

눌린 수포만큼 만약이 찌그러져요

숨이 찬 수영모는 말풍선이 되고

 

아니다아니다나는아니다고양이

야옹거리는 물고기, 빠져 죽을 발이 달린 물고기

버둥대는 익사(溺死)가 주문을 걸다가

날카로운 휘슬 소리에 솟구쳐요

 

어머니가 보낸 운동화

도착했다는 알람에

오리발을 벗자

홈쇼핑에서

풍선을 팔기 시작했어요

빨강 파랑 이번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라환희 시인 / 에리직톤은 이제 무얼 먹어야하지

 

 

화면 속 코뿔소는 뿔을 깎아내기로 했어 뿔은 도시로부터 도망치기 불편했으니까

(도시는구멍뚫린숟가락을만들고숟가락은비대해진도시를먹여살리느라멈추지않지)

 

레미콘은 그린벨트를 풀어낸 자리에 무엇이든 씹을 수 있는 거대한 콘크리트 이빨을 이식하고 퇴근했어

(계단모양엘리베이터는이순간도버튼눌러대빨리빨리높이높이더 더더더모래는 얼마든 있지도시는침뱉을뒷골목필요해)

 

채널을 돌려봐, 사막은 사하라를 고비를 채우고 흘러넘쳐 이제 사막의 별을 보기 위해 터번을 사지 않아도 돼

(홈쇼핑이보내준마스크는눈까지가릴수 있지눈감땡감노래하는사이창문턱에모래쌓였어놀라지마아이야학교가는길쌍봉낙타만나도 뉴스거리아냐)

 

방부제 뿌린 먼지는 날마다 싱싱해지고 부패하지 않은 것들은 식욕을 자극하지

(쉿!불을꺼콘크리트이빨들이깨어나기시작했어)

 

우리 배부른 척할래!

 

 


 

라환희 시인

2009년 《수필과 비평》으로 수필 등단. 2022년 《시시사》 신인문학살으로 시 등단. 저서 『말이 되어 줄래』 출간. 2021년 수필미학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