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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은유 시인 / 잔혹한 식탁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고은유 시인 / 잔혹한 식탁

고은유 시인 / 잔혹한 식탁

 

 

고등어는 만만하다

“만원에 세 마리에요”

사지 않을 수 없다

 

일주일 마다 열리는 아파트 장터

막 물들기 시작한 감나무 잎이

떨어진다 침이 고인다

 

“또 고등어야?”

두부를 사며 무시한다

만만하긴 두부도 마찬가지다

 

냉장고에 등 푸른 고등어가 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줄무늬가 희미해진다

물렁해지면서 비린내도 강해진다

 

“물렁한 것들”

당신이 내게 말했다

 

땅 속으로 자라는 무

땅 위로 솟은 무의 밑둥이 푸른 것은

날이 따뜻했다는 것

 

당신이 결재를 하는 동안

나는 빨래를 널고 와이셔츠를 다리고

무를 넣고 고등어를 졸인다

 

발톱이 양말을 뚫고 나온다

등에 푸른 줄무늬가 선명해진다

 

당신은 나의 등뼈를 드러내고

하얀 살만 발라먹는다

 


 

고은유 시인 / 무궁무진한

 

 

물이 가득 담긴 풍선이 소파에 놓여있다

어울리게 소파를 구름이라 하자

 

풍선이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쏠리면

구름 아래로 주루룩 흘러내릴 텐데

땅에 떨어지면 터질 텐데

 

물 대신 공기가 가득한 풍선이라 하면

그녀가 아니지

 

물이 가득 담긴 풍선이 그녀다

구름을 다시 소파라 하자

 

벌거벗은 그녀가 소파에 누워 있다*

 

중력에 굴복하는 모든 살이

소파 밖으로 팽창하며 늘어져 있다

 

방심한 듯

소파에 전신을 걸쳐 놓았지만

손끝은 의자 등받이 위에 살짝 굽힌 채 힘을 주고 있다

마리오네트 인형을 조정하는 실처럼

손끝에 그녀가 매달려 있다

 

소파는 그녀의 튼튼한 다리의 확장이다

그녀의 다리가 소파라 해도 무방하다

그럼 그녀를 소파라 하자

 

낡고 오래된 소파가 당당하게

벽 앞에 잠들어 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누이고

소파가 되었던 그녀가

아침이면 손끝에 힘을 풀고

일어난다

 

땡땡이 무늬 원피스를 입고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칠하고

 

이 지상에 머무르려면

가벼워서는 안돼

 

그녀는

가슴과 배를 출렁이며

쿵쿵 땅을 딛고서

걸어 나간다

 

*Lucian Freud, 「benefit supervisor sleeping」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고은유 시인

2021년 계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서정시학회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