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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왕모 시인 / 내겐 너무 큰 냉장고
찾을 것도 없는데 나는 냉장고 문을 연다 들여다보면 마땅히 먹을 것도 없는데 자꾸만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린다 내 몸은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는 그릇 냉장고 안엔 그릇들이 많아 들여다보면 그냥 쓸쓸한 것들
삼십년 쯤 된 골동품 자물쇠를 본다 오랜 시간의 땟국물 줄줄 흘러 그럴듯해 보여도 냉장고 문을 채울 순 없다 그냥 스스로 채워져 초연해 보이는 것
내겐 너무 큰 냉장고 안에는 수없이 차가운 것들
연왕모 시인 / 들개
야생 잡것 떠돌이 뭐라도 좋지
산넘고 황얄 돌다 목마른 나무에 물 주기도 하지 기쁨에 취해 다리도 떨지
배 채우고 남는 건 바라지 않아 먹일 찾아 떠나는 게 더 신나니까 배가 꾸르륵 울면 그 소리에 맞춰 달리기도 하지 그게 내게 기쁜 주름을 주지
연왕모 시인 / 전망 좋은 방
11층 그 방에선 모든 게 내려다뵈지 안 뵈는 게 없지
십자가 붉은빛보다 이발소 삼색등이 더 밝고 가깝지 어기적거리며 걸어나오는 부른 배가 풍만해 보이지 술 취한 늙은이의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지
30층 건물 중간도 못 되는 11층 그 방에선 대개 다 내려다뵈지 30층 거기면 뵈는 게 없을 거라지
연왕모 시인 / 전파의 제국
너무, 먼지가 쌓여서 그렇게, 땅꾼의 집은 깊어져갔다지
먼지 위에 발을 딛고도, 사람들 빠지지 않았으니 그렇게 점점점점점 가벼워진 거지
너무 깊어, 땅꾼 집은 어둠침침, 아무도 찾지 않는 동굴이 되어갔지
그래저래, 다른 집들 높아져가는데 왜 그렇게 귀가 아픈지 누구도 궁금하지 않았지
마을에서 뱀이 사라진 이후 땅꾼의 행방을 아는 아무도 없었지 먼지 속 깊이, 땅의 온기 있는 곳, 아직 기어다니는 뱀 누군가 보았다 하지 선명하게, 컬러로, 꿈속에서
연왕모 시인 / 호모 에로티쿠스
그 녀석은 고양이다 윤기 흐르는 검은 털과 암흑 속으로 유혹하는 소름 끼치도록 파란 눈동자, 하지만 그 녀석은 수컷이다 누군가의 털자국이 간지러운 속살을 찔러주기를 그리하여 그 녀석은 다른 수컷들과 함께 골목 너머로 울음 소리를 보내는 것이다 문 닫힌 공중전화 부스에서 서로의 털가죽을 태우며 자꾸만 검은 털을 물들이는 어둔 공기를 쫓는다 검게 검게 타들어갈수록 얼마나 그들의 가죽이 검고 더러운지 연약한 속살은 얼마나 일찍 썩어버렸는지 그 안에 흐르는 피는 이미 썩은 채로 흐르고 있다는 걸 자정의 밤공기처럼 그렇게 수많은 먼지가 녹아 흐르는 걸 머릿속에서 뱉어 씹어 쓴 물 빨며 낄낄거리는 것이다
연왕모 시인 / 피지에서 난 담배 피지
바지 멋고 떴네 비행기
누군 장난한다지만 구름도 만들고 도넛도 만들고 붕 떴다 배부르다 난 담배 피지
누군 안 좋다 하지만 바람이 씻어가고 바다가 쓸어가고 휭하다 행하다 그러다 자지
오 마이 파라다이스 오 마이 패러독스
연왕모 시인 / 황토
지친 바람은 사막으로 가서 죽어버린다 바람의 묘지는 소리로 서 있다. 막힌 곳 없는 무한한 길들의 땅에서 너는 무엇을 택할 것이냐
걸어라 무릎에서 모래가 흘러 나오다 어느 덧 네 온몸이 모래가 되어 언덕을 뒤덮어버릴 때까지 그때까지는 아픔을 말하지 마라 산산이 부서져 모래뿐인 이곳에서 너보다 더 아프지 않은 것들이 없으니
연왕모 시인 / 검고도 붉은 인디언 사내 -하얗게 질려 있는 여인을 만나다
그의 몸은 흙에서 자랐다 나무들의 그림자와 짐승들의 발자국과 신의 숨결이 가까운 그곳 거기에 그의 가늘고 질긴 실뿌리가 있다
견고한 콘크리트 인큐베이터에서 길러진 그녀는 이제 그의 이야기를 더듬는 중이다 그의 가슴에서 뻗어나온 실뿌리 몇 가닥에 젖가슴을 내어 맡기는 중이다. 부풀어오른 젖꼭지 아래서 맹렬히 솟구치려는 젖의 흐름을 가까스로 저지하는 중이다
그녀의 몸 안에 그는 흙을 채운다 한삽 또한 삽 흙이 채워지는 그녀 눈앞으로 바다가 다가온다 이제 그녀는
바다를 건널 준비를 한다 깊은 바다 아래를 걸어 물품들을 헤치고 가는 꿈을 꾼다
언제쯤 그녀의 젖이 터질지 콘크리트 벽은 더 차갑고 단단하게 몸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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