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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경 시인 / 돌을 든 여자
두 여자가 나에게 돌을 던졌다 어디서 본 듯도 하지만 전혀 모르는 두 여자가 내 앞으로 달려오며 마구 돌을 던졌다 맞으면 죽거나 다칠 크고 날카로운 돌 정신없이 쫓기다가 돌아서서 소리쳤다 대체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가 뭐죠?
두 여자는 돌 던지기를 멈추었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돌을 던진 여자는 누구일까 왜 나는 꿈에서라도 돌을 맞아야 했을까 정말 나는 돌에 맞을 이유가 없는 것일까
꿈-사고와 의식의 관계 및 억압과의 관계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표출 돌을 든 여자는 나였다 돌을 맞은 여자도 나였다
의식은 포기포기 무의식에 창궐하여 깊은 잠에 이르면 돌을 집어든다 선善의 한계를 시험한다 누구도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없다
윤준경 시인 / 강물의 트라우마
무심히 흐르는 강이라고 함부로 말해왔다
말이 없다고 하마 생각이 없겠는가 하마 오목한 슬픔이 없겠는가
숙명처럼 흘러가며 버리고 버리면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에 후회인들 없겠는가
얼어가는 제 몸을 내려다보며 두려움이 없겠는가 죽음의 공포인들 없겠는가
무심한 듯 흐르지만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서서 제 상처를 만져주지 못하는 운명
빛나는 은률 사이사이 기쁨의 감탄사 밑으로 자멸자멸(自滅自滅)흐르는 암갈색 강물의 트라우마
윤준경 시인 / 나 한 그루 나무가 되어
내 평생 바라던 일은 한 그루 나무가 되는 일 나무나라 푸른 숲으로 가서 공주든 하녀든 무엇이든 되는 일
나무나라에서는 공주나 하녀나 똑같지 이 나무 저 나무 안아보며 나무의 언어와 침묵을 배워 그들의 발을 씻겨도 좋고 내 발을 맡겨도 좋으리
온종일 숲의 향기가 내 몸을 싸고돌아 앉아도 서도 나는 한 그루 순한 나무 가슴에 입을 대보고 흠흠 냄새를 맡아보며 세상에서의 하루처럼 바쁠 일도 지칠 일도 없이 근심도 노여움도 가까이 올 수 없는 나만의 나이테로 벅차오르겠네
어느 나무도 독한 말은 안 하지 가시나무 붉나무도 거짓말은 안 하지 그들의 뿌리를 사뿐 밟고 안녕?반가워! 나무의 언어로 말하며
어쩌다 나뭇잎 건드려 상처를 내면 미안해,미안해 호호불어주고 괜찮아,괜찮아 싱긋 웃어주는
나무의 넓은 마음도 배우겠네
나 세상에서 딸 노릇 어미노릇 사람노릇 해봤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네 이제 평생 원하던 나무나라에서는 공주든 하녀든 열심히 해보겠네
사랑도 미움도 모르는 나무의 나라 인생의 헛된 면류관 다 버리고 나 맨발로 숲으로 가서 나무의 생각,나무의 언어,나무의 향기로 살아보겠네
그것은 내가 평생 꿈꾸어온 일, 사람의 도시여 안녕, 나 나무나라로 가네
윤준경 시인 / 눈물호수
씻어내야 할 슬픔을 모아 가슴에 호수 하나 가지고 있지
세상은 웃고 살자 하는데 삶은 구 할이 슬픔이므로 쏟아내지 못한 슬픔의 곳간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색 색깔 물고기를 키우며 악어같이 사나운 짐승도 키우며 구 할의 슬픔을 견디는 거지
그 호수가 없다면 한사코 휘청거리는 인생길을 어이 버티리 희망은 점점 희미해지고 가끔은 호수가 절망으로 넘쳐 눈물로 흐르는 것
눈물은 최상의 정화수 나만의 케렌시아를 찾아 왈칵, 쏟아내고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물고기들을 위해 눈물을 가두는 거지
윤준경 시인 /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 사랑을 하리 머리에 장미를 꽂고 가슴에 방울을 달아 잘랑잘랑 울리는 소리 너른 들로 가리라 잡초 파아란 들녘을 날게 저어 달리면 바람에 떨리는 방울소리 방울소리 커져서 마을을 울리고 산을 올리고 하늘을 울리고 빠알간 얼굴로 돌아누워도 잘랑잘랑잘랑 잘랑잘랑잘랑 나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면 머리엔 장미를 꽂고 가슴에 방울을 달고 사랑을 하리 사랑을 하리
윤준경 시인 / 슬퍼도, 봄
식음을 놓칠 걱정도 자고 나면 길이 되었네 누리장꽃 같은 생의 향기가 이따금 사는 이유를 물어오지만 둥지에서 밀려난 붉은머리오목눈이도 알몸으로 이 강을 건너야 하리 뻐꾹새 기쁜 듯 울고 간 한나절 날은 차츰 쉬 어두워오고 절망을 뒤집어 싹을 틔우면 슬퍼도,봄 산도 강물에 두 발을 담그고 제 그림자를 쓰다듬고 있네
윤준경 시인 / 자작나무 눈물
아들이 자작나무 물을 가져왔다 물오른 자작나무에서 빼낸 물,노폐물이 싹 빠진다고 어서 마시라고 에미가 제게 보약 달여 먹이듯 한 컵 가득 들이민다
풋풋한 나무의 향, 처음엔 싱싱한 수액이더니 마실수록 찝찔한 자작나무 눈물이 들어있다 뿌연 눈물에 자작나무 붉은 피가 섞여있다
칼바람을 마시며 젖을 빨아올린 자작나무, 내 안에 들어와 끙끙 신음을 토한다 여기저기 갈라진 틈을 메우며 팍팍한 생을 어루만지며 자작나무 제 눈물로 나를 적신다
한그루 자작나무 나, 푸르게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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