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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선 시인 / 누이의 자리
고향 마을 먼 들판에 놓여 있는 성냥과 같은 간이역에 가면
누구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내 누이가 앉아 있습니다
늦은 오후에 한 차례 기차가 지나가고 그 바람에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잠시 깨어 날 뿐 그 밖에는 진종일 아무 시간도 흐르지 않는 간이역 대합실에
어디로 떠나갈 사람처럼 누이가 앉아 있습니다
찰싹이는 물살에 수도 없이 낯짝을 씻긴 까만 조약돌 같습니다
신용선 시인 / 마취房
볕드는 곳으로 침상을 옮겨다오
오다가 멈추고 다시 더 축축한 땅에서 올라오는 저 노래가 싫다
부드러운 혀를 가진 설교사의 마른 얼굴에 번지는 눈물이 싫다.
누가 나를 멀리 보내는가.
누구에게 까마득히 잊혀지기 위해 이리도 오래 떠나고 깄어야 하는가.
님의 집을 쓰는 홀애비처럼 등이 가렵다.
신용선 시인 / 火葬.1
가까이 오지 마셔요, 어머니 물나가고 뻘이어요
보셔요, 달빛이 씻어놓은 말간 나무와
풀려서 물이 되기 위해 떨어지는 물방울
근육질의 새떼는 눈을 꿈벅이지 않아요.
내가 잠이 들면 물풀이라도 흔들고 계셔요, 어머니
혼자서는 꿈꾸지 못해요.
신용선 시인 / 믿음
살았던 일이 무효가 된다는 믿음은 편하다.
비가 되어 쏟아져버리는 먹장구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죽음이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믿음은 편하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은 까다롭고 불편하다.
사는 일을 죄가 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로 구분하게 한다.
신용선 시인 / 쓸쓸한일 1
아름답던 것들을 보며 아름다움은 참쉽게 상한다는것을 깨닫는 일은 쓸쓸하다 아름답던 여인을 보며 지금도아름답다고 말하는일은 쓸쓸하다 먼발치네서 누구를 비라보는 일만으로 가슴이뛰던 시절이 있었음을 생각하는 일은
신용선 시인 / 불면1
세상이 마구잡이로 흘러가버려도 모르고 곤히 잠들고 난 자들은 얼마나 개운할까
여우가 파먹고 들쥐떼가 뜯어가는 거친 들판의 잠 속에 홀로 남겨졌다가 해골이 되어 돌아오는 자들은
화해하고 용서한 날처럼 머리가 맑으리라
신용선 시인 / 불면2
고래심줄보다 더 질긴 이놈의 잠과의 실랑이를 끝내게 해다오
재깍거리는 시계소리처럼 잘들지 않는 사람들, 사시장철 시퍼렇게 깨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누가 나를 좀 끄집어 내다오
끄집어 내다가 깃털처럼 가벼워질 때까지 북어패듯 나를 좀 두들겨다오.
신용선 시인 / 불면3
우리가 온갖 악조건을 이기며 잠을 청하고 있을때
사랑으로 미친 이들의 아무 잠도 없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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