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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승원 시인 / 흰 수련꽃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2.
한승원 시인 / 흰 수련꽃

한승원 시인 / 흰 수련꽃

 

 

흐르는 물이 잠시 머무르면서

시끄러움과 고요를 한데 버무려놓은 그 미녀의 하얀

아십니까,

 

미녀는 잠이 많다는 속설대로

물에 뜬 채로

오후 1시쯤부터 졸기 시작하다가

4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깊은 잠을 자버리는

그녀의 잠을 깨우고 싶어 나는 안타까워합니다,

 

잠자리에 들 때에도 자고 일어날 때에도 늘 상큼하지만

저 세상 돌아갈 때는 추한 모습 보여주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깊이 수장시켜버리는 그녀

아, 그녀의 깊고 그윽한 알몸의 영원한 잠이여

 

 


 

 

한승원 시인 / 강(江)

 

 

내 탐진(探眞)의 강에 성스럽고 풋풋한 여자 살고 있네.

언제 입 맞추고 춤추며 노래하고

언제 수다를 떨고 언제 침묵할 것인지,

언제 슬퍼하고 언제 앙칼지게 울부짖을 것인지 아는 그 여자는 밤마다

우렁이각시 되어 내 침실로 찾아와 질퍽한

사랑의 담금질로 나를 잠재워 놓고 이 강으로 돌아가네.

그 맨살의 향 맑고 달콤한 맛에 환장한 나는

바람 되어 그 여자 물살을 철벅철벅 밟아대고,

해오라기 되어 여울목에서 은어 사냥에 몰입하고,

먹구름 되어 천둥을 토하며 그 여자의 몽실몽실한 은빛 가슴에 비를 뿌리고,

산그늘 되어 그 여자의 심연에 나를 담그면

아, 타오르네, 우리 사랑 술 익는 해질녘의 타는 노을처럼.

 

 


 

 

한승원 시인 / 내 무덤-도산사 가는 길 28

 

 

우리집 앞 골목 비좁아서 대문 앞까지 장의차 못 들어올 터인데

얼마나 고생을 할까 내 관을 멘 사람들

내 무덤 고향 바다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와 인연했던 사람들

그 인연의 빚 갚겠다고

한 시간 반 시내버스에 시달리고

8시간 고속버스에서 흔들리고

가파른 그 고향 산언덕까지 내 무덤 찾아가느라고 얼마나 고달플까

에라

나하고 불행하게도 인연했던 사람들아

그 뼈다귀 무얼 하게 거기까지 끌고 갈 것이냐

벽제 화장장에서 태워 날리고 뼛가루는

너희들이 뿌리고 싶은데다 뿌려라

구름 되고 눈비되고 안개비 몇 알 되어

산과 들의 나무에

들풀 위에

논밭의 곡식과 바다와 강에 내려

소나 돼지나 닭이나 말이나 뱀이나 풍덩이나 새들의 피와 살 되고

사람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너울거리고 뛰어다니고 출렁거리게

나와 인연한 만큼의 빚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아

나 보고 싶고 그 빚 갚고 싶거든 그냥

구름 강 바다 산천 초목에

들꽃 한 포기한테 절하고

눈길 맞추고 입맞추고 말아라.

 

 


 

 

한승원 시인 / 첫사랑

 

 

 꽃사슴 키우며 덕도 첫머리 마을 산기슭에서 산다는 쉰여섯 살의 그 여자 돈 많은 뭇남자들 승용차 타고 와서 자기앞수표 내밀고 사슴뿔 자르고 피 마시며 힘 돋우는걸 보면서 아쉬워한다. 어린 시절 한 동갑내기 머슴애에게 나무접시만큼하게 커진 가슴 만져보라고 내밀던 그 여자 자꾸 앓곤 한다는 쉰여섯 살의 머슴애에게 그 피 먹여주고 싶어 그 머슴애를 해저문 날 기다린다. 얼굴에 노끈 같은 주름살 깊어지고 머리칼에 서리가 허옇게 내려 있는 그 여자.

 

 


 

 

한승원 시인 / 꽃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 시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

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나는

칠보 장식한 비천녀의 공후인

시나위 가락으로 출렁거리는 혼령입니다.

별똥 떨어진 숲까지 다리 놓는 무지개로

쨍쨍 갠 날의 음음한 콧소리 합창으로

원시의 늪지대 달려가는 암컷 사슴의 숨결로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다

시 같은 웃음을 까르르까르르 알처럼 낳는 것입니다.

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폭죽처럼 터뜨리는 것입니다.

이상(李箱)처럼 객혈하는 것입니다.

 

 


 

 

한승원 시인 /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그 한복판에 수직으로,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는 새 아닌

새 한 마리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하나가 거기 떠 있어서입니다.

내가 늘 하늘을 보는 까닭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하나가 거기 있어서입니다.

 

 


 

 

한승원 시인 / 손거울

 

 

 삼십 년 전 내가 근무하던 중학교 우렁이각시 같은 여선생님은 여름철에 허벅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곤 했는데, 학교 안에 '오늘 우리 여선생님은 빨간 팬티 입었더라‘는 말이 떠다녔습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통로에 떨어져 있는 손거울을 발견한 그녀는, 생활지도 주임을 앞세우고 가서 그 반 학생들의 호주머니 검사를 실시했는데, 키 작달막한 아이의 호주머니에서 손거울 한 개가 더 나왔습니다, 생활지도 주임은 그것을 압수하면서, 이 손거울 가지고 다녀야 하는 이유가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말하고 찾아 가거라, 했고, 키 작달만한 아이가 교무실로 와서

 

  ‘꽃한테 제 얼굴을 비춰주려고요’ 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옆에 앉은 여선생의 연꽃*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했는데, 생활지도 주임이 빈정거렸습니다, ‘야, 이놈아, 꽃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꽃이 제 얼굴을 알아본다냐?’ 학생이 말하기를, ‘모든 꽃은 거울 속의 자기 얼굴을 보고 비틀어진 꽃잎을 바로잡고 향기도 더 진하게 뿜습니다,’ 얼굴 빨개진 생활지도 주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고 썩 꺼져!’ 하고 소리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돌아가려 하지 않는 그 학생을 나는 내 자리로 데리고 가서 물었습니다,

 

 ‘그것을 누구한테 배웠니?’ ‘우리 할머니요,’ ‘네 할머니 무얼 하는 분이시냐?’ ‘점도 쳐주고 굿도 하러 다니셔요,’ ‘네 할머니는 집에 꽃이 피면 어떻게 하시니?’ ‘치자꽃, 족두리 꽃, 금강초롱꽃들이 피면 앞에다가 체경을 세워놓아요, 밤이면 초롱을 켜 달아 놓기도 해요’

 

 가슴에 불이 환히 켜진 나는 생활지도 주임에게, ‘저는 가짜 시인이고, 이 아이하고 이 아이의 할머니하고는 가슴으로 시를 쓰는 진짜 시인입니다’ 하며 손거울을 찾아 돌려주고, 이후 그런 손거울 하나를 장만하여, 세상의 모든 꽃들에게 얼굴 보여주기를 부지런히 하고, 그 손거울을 무수히 제작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팔고 또 팔면서 이때껏 잘 살아오고 있습니다.

 

* 노자의 말, ‘곡신(谷神)은 그윽한 암컷[玄牝]이고 그 암컷의 문은 우주의 뿌리[天地根]이다.’

 

―시집 『달 긷는 집』 (문학과지성사, 2008)

 

 


 

 

한승원 시인 / 내 무덤

-도산사 가는 길 28

 

 

우리집 앞 골목 비좁아서 대문 앞까지 장의차 못 들어올 터인데

얼마나 고생을 할까 내 관을 멘 사람들

내 무덤 고향 바다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만들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와 인연했던 사람들

그 인연의 빚 갚겠다고

한 시간 반 시내버스에 시달리고

8시간 고속버스에서 흔들리고

가파른 그 고향 산언덕까지 내 무덤 찾아가느라고 얼마나 고달플까

에라

나하고 불행하게도 인연했던 사람들아

그 뼈다귀 무얼 하ㅏ게 거기까지 끌고 갈 것이냐

벽제 화장장에서 태워 날리고 뼛가루는

너희들이 뿌리고 싶은데다 뿌려라

구름 되고 눈비되고 안개비 몇 알 되어

산과 들의 나무에

들풀 위에

논밭의 곡식과 바다와 강에 내려

소나 돼지나 닭이나 말이나 뱀이나 풍덩이나 새들의 피와 살 되고

사람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너울거리고 뛰어다니고 출렁거리게

나와 인연한 만큼의 빚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아

나 보고 싶고 그 빚 갚고 싶거든 그냥

구름 강 바다 산천 초목에

들꽃 한 포기한테 절하고

눈길 맞추고 입맞추고 말아라.

 

 


 

한승원(韓勝源) 시인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호는 해산(海山),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신아일보 신춘문예 입선하여 문단에 데뷔, 1968년 대한일보 〈목선〉이 당선되어 소설가로 활동, 장동서국민학교와 동신중. 여중 교사로 근무. 시집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 등. 장편소설 '불의 딸', '포구',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국문학소설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서라벌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동인문학상, 순천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