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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호 시인 / 당대의 가치
그들이 이전 세대에 반기를 들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대부분 반성 없이 앵무새처럼. 그러나 잘 들어라 그들은 항상 당대에 반발했다
그대는 어디에 칼을 겨누고 있는가? 죽은 아버지들의 무덤인가, 잔치 때마다 동원되는 전범(戰犯)들의 시체인가
항상 당대에 반발했던 이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전 세대를 운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나 지금에나 사람들은 싸우는 자의 편이 아니니까.
-시집 <성찰> 민음사
전대호 시인 / 네로와 나
파트라슈와 함께 하늘과 맞닿은 길을 누비던 소년 네로는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싶어했다 푸른 언덕 위에 홀로 선 늙은 향나무 그늘에서 귀여운 그의 연인 알로아를 모델로 앞에 놓고도 소년은 말하는 것이었다: 꼭 한 번만이라도. 나는 너무 무거워 보였던 소년의 나무 신발을 기억한다
결국 소년은 루벤스를 보았다 정말 꼭 한 번, 기적이 그를 도왔다 열망은 생애에 꼭 한 번쯤 바람처럼 임하는 기적을 낳는가? 그럴 것도 같애 하지만 기적이란 게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더군. 소년은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 따스한 개털에 파묻혀 미소 지으면서.
나는 막 울었다 그 후로 이제까지도 그만큼 나를 흔든 사건은 없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사랑이나 죽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바램 따위, 개뿔도 이해 안 되는 것들이 마치 내 이름이 외워지듯 가장 밑바닥에 새겨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그때 나는 아직 꼬마였으므로 내 맑았던 두 눈에서 왜 눈물이 나와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전대호 시인 / 믿음직스런 광대
태양처럼 당당했던 시절에 비해 더 오랜 시간이 걸려 말문을 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는 여전한 것 같다 책가방을 처음 챙기는 아이처럼 제 삶의 계획을 얘기한다
세상을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말한다 바꾸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즐기던 얘긴가! 그가 여전히 그런 얘기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 내게도 즐거움을 준다
작은 시냇물처럼 시작된 그의 얘기가 산악 지대와 평지를 지나 아주 큰 물줄기가 될 때까지 어디로 가든 어디로 가든 여하튼 끊이지 않고 이어질 것을 나는 안다 그게 그의 본성이다
내가 그렇듯 그 역시 가로등의 눈으로 우리의 모습을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도 이미 서둘러 충분한 나이를 퍼먹었으니까. 그를 바라보며 편안히 턱을 고인 내게 아, 그는 정말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민음사
전대호 시인 / 누구든
나는 나아간다 달팽이처럼 나의 집을 짊어지고 두더지처럼 눈 앞 희미한 풍경에 굴을 뚫으면서 누구인가 누구인가 저쪽에 우리 젖은 흙에 팅팅 부은 서로의 손 잡기까지는 알아볼 수 없는 그가 누구이든 누구든 나처럼 무지막지한 믿음만으로 벽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천천히 이리로 오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전대호 시인 / 저 철탑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저 철탑이 너무 높이 올라갔다 생업을 놓고 모여 대항할 탑을 쌓자 우리는 기술자도 행정가도 아니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저 철탑, 저 철탑 얼마 전부터 스스로 자라는 철탑 실패한 선조들의 기록이라도 설화라도 뒤져보자 바벨탑이든 쟈크의 콩나무든 다 동원하자 모여라, 시체라도 둘러업고 모여라 시체를 쌓아서라도 주사약과 알약을 쌓아서라도 저 철탑을 견제하자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 철탑을 견제할 수만 있다면. 모여라, 이대론 안 되겠다
전대호 시인 / 마스크 시대의 성선설
우리는 가려진 부분을 좋게 짐작한다. 적어도 그는, 확실히 그렇다.
마스크 사용이 일상화한 이래로 새삼 깨달은 성선설이라고 하겠는데,
지하철에서 건너편 여자를 무심한 척 주시하며 좋은 기대를 부풀리다가 화들짝 실망하는 경험이 하루에도 여러 번.
어디 마스크 너머 얼굴뿐이랴, 어쩌면 우린 드러난 것보다 가려진 것에서 살아갈 힘을 길어 올리는지도 몰라.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가려진 것들아, 너희가 그를 아무리 배신한다 하여도, 선한 그는 너희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전대호 시인 / 마흔 아홉
1.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천문 관찰이 가능하려면 삶이 대단히 단조로워야 한다. 동지를 며칠 앞둔 아침 베란다 블라인드를 젖히다가, 달이 어제보다 성큼 왼쪽으로 이동한 것을 본다. 그쪽 하늘 검푸른 빛 짙어지고 노란 빛 내리눌려 산의 윤곽 더 예리해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구나. 어제 이맘때의 하늘, 그 밋밋함을 기억하여 지금의 밋밋함과 비교하다니, 이 얼마나 장하고 딱하냐.
2. 어제 꿈에 가방을 싸다가 아찔했다. 곁에 친구인지 선배인지는 노랗게 질린 내 안색을 보았을 것이다. 수강 신청만 해놓고 계절이 바뀌도록 코빼기도 안 보인 강의가 한둘이 아니다. 어찌할꼬, 이제라도 사정해볼까. 나는 술이 덜 깼고, 누가 낄낄 웃는다.
아침에 온 통신 기술자가 벽 속에서 전선 가닥들을 끌어내 한동안 끊고 잇고 감싸고 하더니 다시 욱여넣는다. 쑥쑥 들어가는 선들. 마지막으로 보이는 웅크린 뒷등을 하얀 플라스틱 마개가 덮는다. 벽 너머 어둠 속 사정 보이지 않지만 남의 일 같지 않다. 나는 가방. 거죽은 제법 품위 있게 낡았지만, 속은 여전히 편치 않은, 어쩌면 못내 편치 않고 싶은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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