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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용화 시인 / 거울 속 거미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7.
제14회수주문학상당선작

제14회수주문학상당선작

정용화 시인 / 거울 속 거미줄

 

 

덕천마을 재개발 지역

반쯤 해체된 빈집 시멘트벽에 걸린

깨진 거울 속으로 하늘이 세들어 있다

무너지려는 집을 얼마나 힘껏 모아쥐고 있었으면

거울 가득 저렇게 무수한 실금으로 짜여진

거미줄을 만들어 놓았을까

구름은 가던 길을 잃고 잠시 걸려들고

새들은 허공을 물고 날아든다

거미줄에 무심히 걸려있는 지붕 위

주인도 없이 해가 슬어놓은 고요를

나른한 오후가 갉아먹는다

간절함은 때로 균열을 만든다

한 때 두 손 가득 무너지는 인연 하나

잔뜩 움켜쥐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가느다란 손금이 조금씩 깊어졌다

심경,마음을 들여다볼 때 마주치는 거울 속으로

손금이 흘러들어 무수한 실금을 남겼다

균열은 어떤 부재를 품고 갈라진 틈 속마다

허기진 풍경을 흘려 넣는 것인가

무너짐이야말로 더 큰 열림이기에

거울 속 거미줄은 어떤 것도 붙잡아 두지 않는다

나를 흘리고 온 날

서까래 같은 갈비뼈 사이로 종일 바람이 들이쳤다

그러고 보면 깨진 거울은 무너지는 것을

움켜쥐고 있던 집의 마음이었음을

 

 


 

 

정용화 시인 / 백색소음

 

 

안개가 숲을 하얗게 태우고 있는 밤이었네 계절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순한 저녁의 새처럼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 저물어간 날, 눈을 깜빡일 때마다 모래가 박힌 밤하늘이 쏟아져 내렸네 오래 걸어 퉁퉁 부은 발등을 어루만지면 사막에서 날개가 젖은 채 죽어있는 새들의 시간이 만져졌네 어둠이 흘러내린 방안 구석에는 보름달이 뜨고 그 달에서는 짓무른 복숭아 향이 났네 새들의 울음소리가 자꾸만 잠을 갉아먹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모래가 될 수 없는 나는 누군가의 귓속에서 굳어버린 비밀, 소음에 마음을 얹고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끊임없이 걸어가는 발소리가 하얗게 잠을 두드리고 있네

 

 


 

 

정용화 시인 / 꽃들의 발목이 조용하다

 

 

안녕, 인사의 말끝을 무심히 중얼거리다 보면 마음의 얼룩이 차가운 바람으로 불어온다 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꽃들이 길가를 걷고 있다 보도블럭 위에는 오래전 꿈에서 꺼낸 얼굴이 떨어져 있었다 외로움 근처를 오래 서성인 사람의 주머니 속에는 두께를 알 수없는 기억들만 가득 일렁이는데

 

손이 없는 것들은 어떻게 서로를 부르는 걸까 간절한 사연들이 저문 눈빛마다 마른 잎사귀를 심어둘 때 얼굴은 잃어버린 표정들의 무덤이 된다 시기를 놓친 말들은 유통기한이 짧아서 마음 속 오래 방치된 웅덩이가 되고 깨진 꽃들의 발목을 쥔 채 너를 부르면

 

문득 손을 넣었는데 눈, 코, 입이 만져지는 너의 주머니 속에서 오래 웅크리고 있었다 오후 세시를 불러다 놓고 건넬 말을 찾는 동안 주머니에 손을 넣어 추운 이름들을 쥐고 여기에 없는 너를 따라 얼굴 없이 걷고 또 걸었다 한 발을 더 내디디면 이름을 버린 꽃들의 시간이다

 

 


 

 

정용화 시인 / 번짐꽃

 

 

책을 읽다가 물을 쏟았다

문장 사이를 서성이다가

그어놓은 밑줄들 속으로

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물을 빨아들인 종이는

한때 나무였음을 기억하는지

책갈피마다 촘촘하던 결이 풀어진다

잃어버렸던 나이테를 찾고 있는지

행간이 울퉁불퉁해지고 물관을 통해

밑줄들은 물을 먹고 더욱 선명해진다

 

흩어져있는 알록달록한 자국들

슬쩍, 건드리자

손등으로 줄기들이 뻗어온다

밑줄을 그어 가슴으로 옮겨놓았던

구절들까지 꽃피우려는지

발화되지 못한 글씨들이 꿈틀거린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다녀간 사이

느슨해진 책장을 비집고

울긋불긋 꽃들이 일제히 피어났다

꽃은 기억이 밀어올린 밑줄의 흔적이다

미처 뿌리내지지 못한 나무 한 권

문장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서있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09. 여름호

 

 


 

 

정용화 시인 / 소리가 익어간다

 

멀리서 오는 것들은 소리를 품고 있다

떠났던 계절이 돌아오는

플랫폼에 기차가 도착할 때도

소리가 먼저 달려온다

바람이 동사가 되는 시간

허공을 떠돌던 구름은 빗소리가 되어 스민다

새들은 입 안 가득

음절들을 물고 와 숲속에 펼쳐놓는다

나무들은 그 소리를 들으려 몸을 기울인다

가을산이 소리로 자욱하다

기울인다는 것은, 기울여준다는 것은

소리가 스며들 틈 하나 마련해 두는 것

소리가 소통이 되는 힘으로

새들은 날개를 편다

호명되기를 포기한 이름들이

누군가를 간절히 부를 때

화답이라도 하듯

가을은 나무마다 붉은 열매 하나씩 내민다

 

 


 

 

정용화 시인 / 간격

 

 

봄이 오고 있다

겨울에서 이곳까지 굳이

기차를 타지 않아도 된다

걷다보면 다섯 정거장쯤

늘 겨울이 있는 봄

그 간격이 좋다

 

친하지도 무심하지도 않은

꽃과 잎사귀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슬픔과 기쁨 사이

가끔은 눈물과 손수건만큼의

그 간격이 좋다

 

허공을 채우고 있는

겨울, 나무와 나무 사이

외로움과 외로움 사이에 떠 있는

간이역

기차표와 역전다방의 여유

그만큼의 간격이 좋다

 

미처 떠나지 못한 겨울과

오는 봄을 내버려두고

그대와 나 사이

그 간격 속에 빠져버리고 싶다

 

 


 

 

정용화 시인 / 서투른 다정

 

 

사람 독이 묻어온 날에는

저녁이 되어도 쉽게 어두워지지 않는다

 

어둠에서 풀려나오는 무늬를 이해하는 밤

먼 곳이라는 말은 슬픔을 동반한다

모든 소리들이 사라진 곳에서

수요일은 시작되고

 

내가 불면의 시간을 음악으로 바꾸려고 했기에

물고기들은 잘 때도 눈을 감지 못한다

 

알코올이 없는 맥주를 마셨기에 밤에도 무지개가 뜬다

 

오래 건너지 않은 건너편처럼

아직은 낯선 먼 곳의 시간

우리가 버린 말들이 누군가의 귓속에서

농담으로 피어난다면

슬픔은 어떻게 편집될까

 

시들어가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안에서부터 말라 죽는 용설란처럼

실패한 다정들은 사막에 발을 담근 채

집요한 고요를 견딘다

 

모서리에 자주 부딪히는 구름의 언어가

내 안에 살고 있어

너는 푸른 눈동자를 지니게 되었다

 

 


 

정용화 시인

1961년 충북 충주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전문가과정 수료. 동국대 대학원 문창과 석사과정. 2001년 《시문학》으로 등단.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 『바깥에 갇히다』 『나선형의 저녁』. 2012년 수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