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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 내 일상의 종교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핸드폰 기록된 여자들 전화번호를 지워버린 일이다 술이 과하면 전화하는 못된 버릇 때문에 얼마나 나는 나를 함부로 드러냈던가 하루에 두 시간 한강변 걷는 것을 생활의 지표로 삼은 것도 건강 때문만은 아니다 한 시대 내 인생의 나침반이었던 위대한 스승께서 사소하고 하찮은 외로움 때문에 자신이 아프게 걸어온 생을 스스로 부정한 것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만인의 병 한가로우면 타락을 꿈꾸는 정신 발광하는 짐승을 몸 안에 가둬 순치시키기 위해 나는 오늘도 한강에 나가 걷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일상의 종교는 걷는 일이다
이재무 시인 / 나비
명경처럼 환한, 어지러운 햇살 속 하늘을 흔들며 나는 나비 한 마리 주춤주춤 물러서는 허공 수런, 수런대며 안간힘으로 망울 밀어 올리던 장다리꽃밭 항아리 속 고인 물처럼 순간 정적의 바다에 빠져든다 나비가 지나간 빈자리 바람이 다녀가는 호수의 잔물결인 양 고요가 일어 출렁거린다 이제 곧, 장엄한 적막이 지나고 마른 대지를 적시는 큰비가 당도하리라 -시집 <푸른 고집> (천년의 시작, 2004)
이재무 시인 /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어항속 물을
물로 씻어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에서
이재무 시인 /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 보라 떼 지어 몰려오고 떼 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과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 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 비틀비틀 걸어간다
이재무 시인 / 밑줄을 긋다
구름을 밀며 나는 새의 날갯짓에 밑줄을 긋는다 바람 없는 날 비단실처럼 흐르는 강물에 밑줄을 긋는다 자라처럼 목을 어깨 속에 감추고 언덕길에 질질 숨 흘리는 노인의 신발 뒤축에 밑줄을 긋는다 공중의 백지에 일필휘지하는 붓꽃 향기에 밑줄을 긋는다
늦은 밤 방범창을 타고 넘어오는 이웃집 여인의 가느다란 흐느낌에 밑줄을 긋는다 하늘 정원에 핀 별꽃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이재무 시인 / 폐선들
신발장 속 다해진 신발들 나란히 누워 있다 여름 날 아침 제비가 처마 떠나 들판 쏘다니며 벌레 물어다 새끼들 주린 입에 물려주듯이 저 신발들 번갈아 누추한 가장 신고 세상 바다에 나가 위태롭게 출렁, 출렁대면서 비린 양식 싣고 와 어린 자식들 허기진 배 채워주었다 밑창 닳고 축 나간, 옆구리 움푹 파인 줄 선명한, 두 귀 닫고 깜깜 적막에 든, 들여다볼 적마다 뭉클해지는 저것들 살붙이인 양 여태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재무 시인 /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온다던 사람 오지 않았다. 밤 열차 빈 가슴에 흙바람을 불어넣고 종착역 목포를 향해 말을 달렸다 서산 삭정개비 끝에서 그믐달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주먹의 불빛조차 잠이 들었다 주머니 속에서 때묻은 동전이 울고 있었고 발끝에 돌팍이 울고 있었다 온다던 사람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오지 않았고 내 마음의 산비탈에 핀 머루는 퉁퉁 젖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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