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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영 시인 / 함평나비메주ㆍ된장
한반도 흙을 먹고 자란 콩잎사이 나비떼 나라와 콩꽃 피었네 콩밭이랑 어머니 어깨 위에 한가로이 나래치던 나비들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머니 땀으로 빚은 손맛 그리워 메주내음 따라 다시 날아와 흙빛 된장 속으로 숨어들었네.
김필영 시인 / 못
누구나 가슴속에 못 하나 박고 산다 뽑힌 것 같은 착각으로 산다 화살이 되어 날아와 박힌 못은 폐부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아 빼내려 할수록 깊이 파고든다 내게 박힌 못자리가 미어지도록 아파올 때마다 달려갈 수 없어 몸부림치다가 그대가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내가 그대 가슴의 못이었음을 알았다 아려오는 못을 내버려둔다 그 못을 뽑을 수 없는 건 못 잊을 당신 못 잊을 이야기가 포승줄처럼 걸려 있기 때문이다
김필영 시인 / 속눈썹
눈물이 잠든 창가에 드리운 견사커튼 날실 한 올 한 올 사이사이 웃음소리가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날선 빛의 각이 가리키는 방향, 빛나는 쪽에서 어떤 각으로 나를 가리키는가 순한 빛이 그 숲을 통과하며 산란 된다 휘청거리는 빛을 붙들어주고 목발을 짚은 빛을 부축해 들인다 울지 못하나 함께 젖는다 어둠이 세상을 잠재울 때 닫힌 대문 앞에서 잠들지 않는다 폭풍우가 닥쳐도 죽음 앞에서도 눈앞을 떠나지 않는다 눈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것은 속눈썹이 가물거리기 때문이다 속눈썹을 통과하여 기억 속으로 스러진 그대의 눈빛이 그립다 속눈썹을 빠져나가지 못한 눈빛은 어떠한 사랑도 이룰 수 없다
김필영 시인 / 식혜
겨울하늘이 가슴에 품고 있던 눈을 떠나보내고 제자리마저 비우고 싶었는지 식혜 속에 제 몸을 내려놓았다 떫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도 식혜 밥알처럼 가끔은 자신을 비워봄직하다 밥알이 단맛을 찬물에 버리고야 엿기름과 어우러져 삭을 수 있듯 비우고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러안고 서로 삭을 수 있다 빈 마음으로 다가가 가진 온기로 데우며 죄다 주려할 때 서로 달콤하게 맛들 수 있다
김필영 시인 / 갈비탕
반가운 친구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따뜻한 정을 나누기엔 갈비탕이 좋다 그 국물의 남다른 맛은 갈비뼈 속에서 우러나온 것 아기를 품에 재우는 엄마처럼 오장육부를 둥글게 말아 감은 여문 손가락 같은 뼈이기에 그윽한 향미가 깊다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간지러워 자지러지는 것은 그곳에 갈비뼈가 있기 때문이다 순한 황소, 갈비맛과 향이 고스란히 우러난 따뜻한 갈비탕 한 그릇 사시사철 보약으로 손색없다
김필영 시인 / 홍어삼합
사춘기 지날 무렵 장터에서 외삼촌을 우연히 만났는데요
“너도 한길 다 컷응게 탁배기 한잔 혀라 그라고 삼합, 한 점 혀야 어른이 된다잉”
어른이 된다는 말씀 싫지 않았는지 막걸리 한 사발 벌컥 들이켜고 외삼촌이 입에 넣어준 삼합 엉겁결에 받아먹었는데요 콧속으로 치미는 독한 냄새에 안절부절 허둥대던 기억, 어제 같은데요 내 나이 외삼촌만큼 되어 남도식당 노적봉에 가면 묵은지에 삶은 돼지고기 새우젓에 적셔 삭힌 홍어 위에 올리면 삼합을 먹기도 전에 코가 뻥 뚫리고 왜 눈물이 먼저 나는 걸까요?
김필영 시인 / 삭는다는 것
잘 삭은 술은 사랑 받는다 포도가 잘 삭아야 좋은 술이된다 견디기 힘든 고난도 따뜻이 위로하면 아픔이 삭는다 삭은 눈물이 강이 될 때 물 흐르듯 슬픔이 씻겨 일어설 수 있다 항아리에서 잘 삭은 김치는 밥도둑이다 잘 삭은 홍어를 가운데 두고 응어리진 마음도 잘 삭히면 서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삭는다는 것 상처받은 사람만이 삭을 줄 안다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잘 삭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있다 쓴잔을 앞에 두고 눈물 흘려본 사람만이 잘 삭은 술을 마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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