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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시인 / 숲속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또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 새가 앉았던 빈 가지에 날아가 버린 그 새를 앉혀 놓았다.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떠나간 사람 죽은 사람 나는 아직도 그들이 앉았던 빈자리에 그들을 앉혀 놓고 있다.
그들이 없는 텅빈 거리를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말없이 걷는다 거리는 조용하지만 떠들썩하다. 그들이 웃으며 나를 부르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곁을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내가 없는 술집 그 구석진 자리에 나를 앉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아직도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김영승 시인 / 반성 39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을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킥킥 웃었다.
김영승 시인 / 반성 97
어깨동무 개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어릴 때 우리는 그렇게 노래부르며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둘이서 함께 앉았다. 그리고는 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갔고 노래가 끝날 때 또 앉곤 했다. 한 여나무 번쯤 앉았다 일어나면 우리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이젠 어깨동무도 개동무도 미나리밭도 없다. 술에 취하여 하루종일 넘어졌다 일어나도 나는 집에 올 수도 없다.
김영승 시인 / 반성 99
집을 나서는 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읍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쳐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김영승 시인 / 반성 740
어둠-컴컴한 골목 구멍가게 평상 위에 난짝 올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옛날 돈 2만 원 때문에 쫓아다니면서 내 따귀를 갈기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내 손을 잡고 운다
머리가 홀랑 빠졌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고······
나도 그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맥주까지 마시니 돈 좀 생겨지나 보지 하면서 웃는다
이따가 다른 친구가 올 거예요 하면서 나도 웃었다
-『계간 파란』 2022-봄(24)호
김영승 시인 /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김영승 시인 / 반성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잠승의 앞이빨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 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김영승 시인 / 희망 939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아이는 아버지의 주검을 곁에 두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며칠을 지냈다고 한다.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 외로움이 죽음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아이는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구나. 아버지의 몸 썩는 냄새가 오히려 정겹고 그 곁에 누워 오히려 행복했을 아이의 고요한 밤이 깊어가고 있다.
외로움, 죽음보다 무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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