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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시인 / 우물 깊은 집
경적 소리에 놀란 새벽 깊은 우물이 부르면 대책이 없었다 ᄀ은 그것을 환각지라고 했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사람이 없어진 팔다리가 그대로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두고 온 집은 잊히지 않았다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에는 배겨 낼 장사가 없었다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는 ᄀ, ᄂ, ᄃ, ᄅ의 무책임한 충동을 길들였고 깊은 우물이 부르는 소리는 간밤에 덮고 잔 라면 박스보다 간절했다
김밥과 소주를 사들고 슬며시 들러 본 우물 깊은 집 그을린 대문이 바람에 열렸다, 닫히고 무너진 벽 모서리마다 활짝 핀 해바라기 예전의 안방에는 타다 만 장롱이 엎어져 있다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불타지 않은 데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시원한 물을 길어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운 곳 우물밖에 없구나!
소주를 마시고 깊은 우물을 내려다보니 목이 잘린 부모님과 철사로 찬찬이 묶인 아이들이 소곤소곤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네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마당에 뒹구는 벽돌을 모아 우물을 메우며 우리 집에 누가 불냈어?
장정일 시인 / 낙인
티 브이를 켜니 서부극인 모양이다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카우보이가 밧줄 올가미를 휘휘 휘둘러 마구 뛰어달리던 야생마를 낚아채뜨린다 그런 다음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뜨거운 부젓가락을 버둥대는 말엉덩이에 사정없이 눌러찍는다 양키들은 잔인하구나! 채널을 다른 방송으로 돌리자 광고가 흐르는데 말같이 튀어나온 한국 아가씨의 엉덩이에 리바이스 청바지 상표가 빨갛게 눌러찍힌다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1987
장정일 시인 /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장정일 시인 / 시인
시를 청탁하는 전화가 왔다. 말라비틀어진 나무에 링거병을 달아준 것같이 가슴이 마구 뛰놀았다.
시침을 떼고, 고료부터 물었다. 죽은 나무가 꽃이라도 피울 기세로! 아직 살아 있다는 듯이!
한때 시를 쓴 적이 있었지만, 곧바로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 후로 몇 년간 청탁을 물리치는 게 진통제가 필요할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나저나, 십칠 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인들은 무대포로 살고 있군.
아니, 고료가 한 푼도 안 올랐다니 나는 십칠 년 전이나 마찬가지로 현역이었군.
장정일 시인 / 해피 엔드는 없어요
그것을 이상이라고 그것을 승리라고 그것을 원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해피 엔드겠지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입니다 전 세계의 연인들이 두 사람의 비극으로부터 사랑의 이상과 승리와 원형을 구한다면 말입니다
우리 물리칩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물론이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반복하는 허다한 시와 소설과 영화를 물리칩시다, 비웃어줍시다! 압박자위를 따라하지 맙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산업입니다
사랑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사랑에는 승리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원형이 없습니다 그런 해피 엔드는 없어요
사전을 토해내는 사랑 원본을 물려줄 수 없는 사랑 스위트홈이 거부하는 사랑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랑 우리는 껴안아야 해요 캄캄하고 불안하기만 한 현재와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대본을
사랑은 실험 해피 엔드는 없어요
장정일 시인 / 하얀 몸
하얀 몸, 당신은 어디에 있었느냐? 곤한 잠에 빠져든 소년이 불려오고 창틀 가까이 내가 앉았을 때, 하얀 몸 당신은 보았느냐? 물에 적신 수건을 짠 후 대장님이 어린 소년의 항문을 닦을 때 동그란 그 소년의 눈매가 떨 때, 당신은 어디 있었느냐? 하얀 몸.
나는 거기 있었다. 하얀 몸, 네가 없었을 때 나는 창틀 가까이 앉았다. 하얀 몸, 그때 나는 감기에 걸려 있었다. 겨울날, 구멍난 내복 바람으로 창틀에 쭈그리고 파수 보는 일은 힘들었다. 너는 어디 있었느냐? 정말이지 나는 힘들고, 떨렸고, 아팠다!
잠시 후, 소년은 큰 대장의 무릎 밑에 내리깔렸다. 나는 끙, 소리를 내었다. 모세혈관같이 섬세히 찢어진 유리 틈으로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기침이 터져나오려 했다. 하얀 몸, 나는 그 소년이 항문으로 당하는 동안 그 소년의 고통을 오래 지키는 파수꾼이었다. 감기보다 고통스러웠다.
하얀 몸,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둔 복도 밖의 운동장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물론 너는 나타나지 않았고 간수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열이 났다. 동물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대장자식이 미웠고, 하필이면 항문을 달고 있는 열세 살 꼬마의 저항없는 순교도 미웠다.
이번엔 소년이 끙, 소리를 냈다. 대장자식이 소년의 한가운데를 못질한 것이리라. 꼭, 이천 년 전의 하얀 몸, 너같이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의 처형을 속수무책하던 그 시절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소년이 연이어 비명을 지른다 귀나 막을까? 듣지 못하는 개처럼? 기침이나 해댈까? 히스테리적으로? 유리의 성에나 닦을까? 파수를 잘 보기 위해
장정일 시인 / 도망
도망가서 살고 싶다 정일이는 정어리가 되고 은희 이모는 은어가 되어 깊은 바닷속에 살고 싶다
장정일 시인 / 탬버린 치는 남자
나는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될껴 회색 빌딩 숲에서 외로이 짖어대는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될껴 천둥치고 비바람 부는 날 밤 늦도록 컴퓨터를 만진 사람은 모두 탬버린 치는 남자가 된다지 이튿날 쾌청한 거리에서 실실 웃는 탬버린 치는 신사가 된다지 번개가 빌딩의 피뢰침을 내리칠 때 컴퓨터를 치던 손끝으로 전류가 오른다지! 나는 탬버린 치는 미친갱이가 될껴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500억짜리 빌딩에서 일하는 회사원이 될껴 밤늦도록 컴퓨터를 만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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