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세복 시인 / 행과 행 사이
이른 봄이면 당신은 매일 들판에 나가 시를 지었다 당신이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행을 나누는 것이었다
나는 겨우 새참 막걸리를 날랐다 당신의 일소나 쟁기가 될 수 없었기에 다랑논 첫머리에서 당신을 부른 후 독새풀이나 뜯고 있었다
당신이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에도 나는 당신이 행갈이 마친 시편에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신의 시풍은 늘 고루하였다
나올 것 없는 논바닥을 뒤적이며 시를 쓰는 당신이 싫었다 차라리 가까운 어물전에서 새우젓이라도 뒤적이길 바랐다
당신이 시를 마저 완성하려고 들판을 자주 들락거리던 어느 계절 나는 당신을 떠났다 도시 어디에라도 멋들어진 시를 남기고 싶었다
당신은 끝까지 흙에다 시를 쓰다 갔다 마지막까지도 고루했던 당신의 시와 갓 세련된 척하는 내 시 덕분에 우리의 행간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배세복 시인 / 설옥
찌걱찌걱 도달한 지천명이 원고지 위에서 굽돈다 스탠드 조도를 낮추고 커튼을 슬몃 걷어낸다 눈발이 가로등 밑에서 앞다툰다
봄이 있었던가 늘 허허벌판의 시간들 인가는 잠들고 불빛은 사라졌다 자정은 벌써 지났으나 새벽 따위는 당도하지 않고 겨울마다 얼어붙던 기왕증 부어오른 손등 같던 것들
가로등 밑에 몰려드는 눈처럼 이 밤 어디든 눈이 내릴 것이다 어떤 짐승이 눈을 털어내며 둥지를 잘못 올렸다 울어댈까 가로등은 오랜 지병처럼 으레 눈발을 부각하지만 그마저 지천명의 한 발자국 눈 위에 찍힌 흔적이었으므로
커튼을 조용히 닫는다 눈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섧거나 혹은 대찬 소문들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아 다시 조도를 높인다 등을 굽힌다
-무크 〈시흥문학> 초대시 2024년(통권 제34집) 발표
배세복 시인 / 저수지의 돌들
저수지에 가서 보았다 방죽의 돌들은 반쯤 잠겨있었다 고요한 저수지는 파도가 치지 않아 돌들은 항상 반은 말라 있고 반은 젖어있을 것이다
누가 제 삶이 젖어있길 원할까 물낯의 윤슬처럼 햇빛 가득한 표정이거나 물오리의 물갈퀴에 물방울 몇 점 튀더라도 금세 환하게 마르는 얼굴이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너무 축축하여 말릴 새 없이 세월 흘러간다 돛을 꺾을 정도의 격랑으로 일어날 수도 없고 수면 위로 튀어오르는 물고기도 아니기에 한쪽 얼굴 가라앉은 채 지낼 뿐이다
이를테면 어긋난 인연으로 서로 다른 방죽을 걷게 된 경우거나 혹은 퍼붓던 별사別辭의 서러움에 관해 소매 부여잡고 따질 사람이 저수지보다도 깊이 사라져 간 경우다
햇빛과 물낯은 서로 멀지 않기에 반은 마르거나 반은 젖은 채 살아갈 수 있다 뽀송뽀송한 삶만 살 순 없다 수면에 반만 머리 담근 돌들처럼 나도 가만히 거기 눕고 싶어진다 -계간 『시와 징후』 2024년 여름호 발표
배세복 시인 / 어떤 불면 ㅡ달리
그는 이 밤도 넥타이를 여기저기 늘어놓는다 검은색을 하나 집으며 얼마냐 묻자, 값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 눈을 찡긋거린다. 그가 흥정에 능한 장사치가 아니란 걸 알기에 낮은 가격으로 중얼거려 본다 딱한 표정의 그가, 그냥 가져가고 나중에 깊이! 한껏 신이 난 나는 방으로 넥타이를 끌고 온다 어둠을 목에 두른 밤처럼 그때, 자맥질하던 오후의 바닥 깊은 곳, 아 둑시니 같은 것이 목을 눌러오던 시절, 뚝 끊어 그에게 내민다. 아직 조금 부족해! 넥타이를 매만지던 어떤 여름은 어떨까 홍조를 띄우며 기울 앞에 선 어느 첫 출근길, 계절이 바뀌고 다시 거울 앞에서 그래! 이대로 넥타이를 확 조였던 사람도 있었다는 데, 묵음으로 번지던 초침, 뚝 떼어 들이민다 그런데 그가 어디 갔을까 이렇게 베갯잇 축축하게 해 놓고 적, 시, 게, 해, 놓, 고...... 투덕투덕 빗소리에 잠 깬 아침, 물방울무늬넥타이를 거리에 펼쳐놓고 그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배세복 시인 / 죽은 새를 대하는 네 가지 방식
푸른 하늘 훤히 보이는 방음벽 아래 작은 새가 죽어 있다. 오빠 이것 좀 봐! 딸아이가 외친다 아들이 재빨리 다가가 주저 없이 새를 들어올린다 야 임마, 그건 왜 만져! 소리를 지르자 살그머니 내려놓는다 불쌍하잖아요! 돌아오는 내내 둘은 멧새처럼 조잘거린다 오빠 저 새는 어떻게 돼? 큰아이가 대답한다 썩어 없어지게 될 거야! 우리가 묻어주면 될 텐데? 안 돼, 아빠한테 혼나! 집에 도착해 작은아이가 다시 재잘댄다 우리가 무얼 본 줄 알아, 엄마? 새는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거 맞지? 저녁을 준비하다 말고 아내가 전화한다 구청이죠? 예, 거기 말이에요 방음벽 교체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뭘 그런 걸 항의를 해! 저녁에 불현듯 죽은 새가 내 귀에 지저귀었다 그러니까 너 말야, 천국도 잃고 연민도 키우지 않고 전화도 못 하는 방음벽 같은 너! 새는 나에게 와서 모두 죽었다
배세복 시인 / 저녁의 습속 저녁이 심지를 당기네 사그라든 불씨가 구름의 엉덩이로 옮겨붙네 삼촌 여기 서쪽 손님들 숯불 좀 채워줘 불판이 달구어지네 창문이 붉어지고 가로수는 아까부터 반 남짓 타오르고 있네 지글지글 빨리 드세요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은 온통 화식(火食)주의! 어느새 어둠이 모여들어 남은 저녁을 뜯어먹네 아이구 다 타 버렸어 여기 숯불 좀 치워줘 가로수는 아예 재만 남고 공중의 새들도 사라지네 어둠이 저희끼리 속을 모조리 게우고 있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1월호 발표
배세복 시인 / 점묘의 나날
당신처럼 어눌한 화가는 처음이다 밑그림을 한 줄도 그리지 않았기에 채색이 시작될 거라곤 생각 못 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세상을 건너뛴 당신 구멍 난 캔버스가 보이지 않냐고 어찌 내 앞에서 무례하게 붓을 드냐며 수많은 밤 당신의 팔레트를 집어던졌다 펄펄 뛰던 밤들이 감히 지나가버리고 꿈마다 찾아가서 훌쩍거리면 벚나무에 물어보라 당신은 시치미 뗐다 지는 꽃잎은 꽃자루를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듯 봄밤은 제멋대로 벚꽃잎을 점점이 휘날리고 따지고 보면 절필을 강요한 건 나였다 누구보다 아둔한 캔버스였다
배세복 시인 / 목화밭 목화밭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에게 배운 노래 흥얼거리며,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어떤 게 진자 꽃일까 누이는 분홍색 진짜 꽃만 꽃이라 불렀지만 목화 다래 익어 벌어진 목화솜도 나는 목화꽃이라 우겼네
목화밭 목화밭~, 홀로 목화를 따러갔네 누이 없이,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멀리서 볼 때만 한없이 아름다운 꽃이었네 두둥실 흘러갈 것만 같은 꽃이었네 아무리 따도 바구니는 채워지지 않고 세상 모든 것이 다 멀리서만 그러하였네
목화를 따러갔네 목화를 따지 않았네 밭둑 사이 피어난 나무 그늘에 누워 하늘을 보았네 목화꽃은 이상하기도 하지 하늘에도 저렇게 많이 피어 있다니, 저 꽃으로 뭉텅뭉텅 바구니 채웠으면 좋겠다 그치? 없는 누이에게 말을 걸고 또 말 걸고, 잠이 들었네 몇 겹으로 꿈을 꾸면서
배세복 시인 / 추녀는 치솟고
수리조합장 집은 방죽 아래 있었고 하늘로 치솟는 추녀를 가졌다 해는 언제부터 저기서 빛났나 다른 이들은 근처 논밭에서 일했다 길을 걸을수록 뜨거워지는 정수리 방아깨비는 끊임없이 방아질했다 글쎄 요즘에도 머슴이 있다네요 갑은 천천히 머슴 머슴 중얼거려 봤다 꼭 일소가 밭을 갈다가 멈추며 우는 소리 같았다 해는 타올라 저수지 윤슬을 바라보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지는 눈알 그는 이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안장은 꺼지고 체인은 늘어났다 저쪽은 물귀신이 있다는 곳이다 귀신은 왜 사람들을 데려갈까 누구는 데려오고 누구는 데려가고 정말 매미를 잡아 날개를 떼도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왜 산 것들은 죽기 전까지 우는 것일까 갑은 손그늘을 만들어 봤다 여전히 땀은 솟아났다 달걀꽃도 지쳤는지 풀어진 노른자 걸음을 멈추고 치솟는 추녀 쪽을 향해 동그랗게 손나팔을 모았다 아버지, 병이 태어났어요 게타리를 한껏 추켜올리던 을이 갑을 따라 소리쳤다 손톱 끝이 까만 땟국물로 가득했다
배세복 시인 / 툇마루는 울리고
툇마루가 세게 울렸다 병은 숙제하다 멈췄으나 이내 연필을 그러쥐었다 을은 책가방을 마루에 던지고 자주 밖으로 놀러 나갔다 굴뚝 연기가 잦아들어서야 겨우 집으로 기어들었다 겨울밤은 제법 길었다 윗방에 상다리를 펼치면 그제야 공부가 시작되었다 서리태를 고르던 밥상이었다 을이 제일 먼저 잠들었다 책도 펴지 않은 을을 깨우면 생각 중이라며 다시 눈을 붙였다 아침 책가방은 그가 발견했다 가방을 들고 부엌을 향하며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소리쳤다 차가운 가방을 어깨에 두르고 을은 아침도 못 먹고 등교했다 밥이나 죽여라 이눔의 새꺄! 등 뒤로 쏟아지는 말에 을보다 병이 더 한기를 느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은유 시인 / 목련 후기 외 6편 (0) | 2025.10.18 |
|---|---|
| 김리영 시인 / 공기의 정精 외 7편 (0) | 2025.10.18 |
| 이소연 시인 / 초록의 폭력 외 5편 (0) | 2025.10.18 |
| 김영승 시인 / 숲속에서 외 7편 (0) | 2025.10.18 |
| 장정일 시인 / 우물 깊은 집 외 7편 (0) | 2025.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