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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리영 시인 / 공기의 정精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8.
김리영 시인 / 공기의 정精

김리영 시인 / 공기의 정精

 

 

생크림 케이크 위에 투명한 설탕물 입은

키위 조각이나 포도알이 될 걸.

생일날 꽂아놓은 가느다란 양초의 발목

로맨틱 튀튀의 망사 밖으로 토슈즈 신고

누군가 성냥을 그어 불꽃 갖다대면

촛불의 심지가 발가락을 칭칭 감싸지.

증류수가 똑똑 떨어지는 비커 안,

볼이 꽉 끼게 발등으로 밀고 가는 물방울

생살 떼는 아픔으로 커피 향기와 엉겨 붙고,

세상의 낭만을 잊고 사는 당신 위해

더치커피의 배릿한 공기방울 되었지.

 

*쇼팽 작곡, 19세기 낭만주의 발레 작품, 1909년 파리 초연 한국에서는 1946년 서울발레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김리영 시인 / 라면 1

쉽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작고 은빛 나는 법랑냄비에 라면을 삶는다.

세상 사는 재미도 함께 끓여보면 어떨까?

뜨거운 라면가락 속에 살다 얻은 슬픔을

녹여 담을 수 있다면 매운맛 수프는

뿌리지 않아도 되겠지.

그대의 깊은 잠 虛氣와 함께 라면 한 그릇

맛있게 비우고 돌아설 때 나의 꼬이고

비뚤린 일상은 풀려나고……

 

 


 

 

김리영 시인 / 아다지오

 

 

수없이 활강을 반복했지

부드럽게 연습실 바닥에 접지하고

날아오르는 꿈을 꾸는 동안

지구 둘레의 백 배를 날며 잠드는 칼새

 

땅에 닿게 머리를 젖히면

왕자가 허리를 다잡아 주고

그의 가슴에 고개 기대고

팔 모양 바꾸며 높이 나는 꿈

 

터보팬 엔진의 비행 능력을 얻으려고

바를 붙잡고 땀에 절어

파드되*동작을 키워 나갔지

 

천만 년 후,지혜로운 호모 사피엔스는

우주의 보이지 않는 홰에 앉아 쉴지 몰라

바람 부는 날이면 공중에서

알몸으로 짝짓기 하는 칼새처럼

 

*파드되(pas de deux) : 클래식 발레에서 주역 발레리나와 그 상대역이 추는 춤. 아다지오,바리아시옹, 코다 등의 부분들로 되어 있다.

 

 


 

 

김리영 시인 / 뭐하세요?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으며 창밖을 보니

단풍 든 나무 하나 오래 서걱이네요.

바람이 껴안을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들

한 잎 가고,

또 한 잎 가는군요.

뭐하세요?

보내야 하는 나무는 힘껏 잎새들 붙들어 매고

가야만 하는 잎새들은

조금 더 늦게 가려고 안간힘 쓰는 오늘,

한 뿌리에 살아있는 동안 함께 나누는

따뜻한 인사 눈물지는데

뭐하세요?

다 갈 줄 알면서도

마지막 잎이라도 잡아보는 저 나무

바람과 맞싸우며 한순간도 숨죽일 줄 모르는데,

뭐하세요?

오늘, 거기서, 당신?

-시집 『푸른 콩 한 줌』(문학아카데미, 2006) 중에서

 

 


 

 

김리영 시인 / 반 고흐의 라면

 

 

허기진 아침, 밤새 잠들지 못한

노란 컴퓨터 모니터 채운 고흐의 그림

따습게 출렁이는 밀밭길

그이에 덮인 라면 면발

달빛 옆에 뽀얀 라면발이 가득

 

그러다 잠깐 한눈팔면 밤의 카페테라스

그림 속 빈 의자에 앉아 올려다보는

어둡고 시푸른 하늘, 거친 유화의 빗금들

불어 터진 듯 더 굵어져 버리고

휘어진 라면발들

 

투욱, 툭 끊어져 허기도 채워주지 못하고

한가닥씩 그의 노란 방에서 걸어 나와

별이 빛나는 밤이 되어도 줄어들지 않고

카페위, 반쯤 익다 풀어진 달이 뜬다

 

가스레인지 위 꿇고 있는 누런 냄비

라면발 속에서 넘쳐오는 반 고흐의 뜨거웠던 꿈이

어느덧 밀밭 지난 나를 다독이고 있다

브루클린에서 반 고흐는 늘 허기져 있다

 

 


 

 

김리영 시인 / 아마존에서 온 가시

 

 

 가시는 자백하지 않는다.

 

 의사는 손가락 끝을 짧게 바라본다.

 

 가시의 목을 조여 부어오른 엄지손가락에서 염증을 도려낸다. 까만 실로 한 땀 꿰맨 상처를 소독하고, 오그라진 기분을 털어버린다.

 

 뾰족한 앞머리 들이박던 가시를 누가 안아줄까. 돌아오지 않는 가시. 봉합한 엄지손가락 지문이 지워지고, 앱마다 지문 인증을 비밀번호로 바꾼 날 가시가 보고 싶다.

 아마존에서 울창한 나무 한 그루 송두리째 넘어갈 때, 가시는 날아왔다. 숲이 불타고 흩어져도 막지 못하는 사람들. 나무들이 뿜어내는 산소를 들이마실 수 있을까. 따갑게 찌른 가시의 위치를 초음파로 찾아내며, 쓰러진 나무가 보내온 전령을 읽지 못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5년 3월호 발표

 

 


 

 

김리영 시인 / 접종

 

새해 들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눈발 그친 거리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정신이 붕붕 떠다닌다. 몸은 무겁다.

생계 잃은 헛헛한 새 아침을 지나가자.

빈 속으로 단순하게 지나가자.

시베리아 바람 곁을 걸어가며

너덜너덜 찢기자! 치사한 정초(正初)!

비루먹은 귀밑이나 털어먹으면서

칼날 같은 목숨이 멀어지기 전에

코로나 3차 예방 접종이나 맞자.

창밖, 철제 난간에 쌓인 눈은 스스로 녹아내린다.

당당하고 떳떳하게 새 직업을 찾아 나서자.

절대 코로나 블루(corona blue)를 원망하지 말자.

 

 


 

 

김리영 시인 / 낙지

 

 

갯벌에 몸 숨기고 스스로 길 찾을 때

누군가 널 잡아당긴 거야?

침침한 날들보다 환해졌다고

웃는 표정을 단칼에 베어버린 거야?

 

무대는 끝나지 않았어.

몇 번 커튼콜을 받을 때까지

마지막 숨 들이마시고

다리에 힘 빼지 마.

 

이지러지며 꿈틀거릴 때마다

등 돌려온 세상이 너를 향해 브라보 외치는 소리.

살아있다! 살아있다!

 

《시인 동네>2020, 6월호

 

 


 

김리영(金梨英) 시인

서울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 세종대학교 무용교육과 졸업. Southern Oregon University에서 Art 수학. 1991년 4월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서기 1054년에 폭발한 그』 『바람은 혼자 가네』 『푸른 콩 한 줌』 『구름에 기대지 않는 춤』 『춤으로 쓴 편지』 『푸른 목마 게스트하우스』. 2012 제4회 바움문학작품상 수상. 2013차세대안무가클래스 대본, 출연. 2013 홍콩국제연극제 대본,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