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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경 시인 / 포도라고 말해도
인적 없는 강가에서 낡은 관을 목격했다 다가가지 못한 채로 나무 뒤에 숨은 채로 실루엣의 움직임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뇌에서 포도를 꺼내 관에 담아 짓밟는 걸 뇌를 덮고 뚜껑을 덮고 못을 박고 사라졌다 지독한 신 냄새가 이곳 까지 퍼졌다 돌아와서 아침까지 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간밤에 본 장면은 악몽일까 사실일까 강가에 사람이 모여 웅성 거렸다 혀를 찼다 관 주변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붉은 발자국 여러분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해요 범인을 찾아야 해요 께름칙하니 불 태워요 소리치는 저 사람의 실루엣이 똑같은데! 떨리는 입을 열어 포포포포도 포도라고 말해도 포도 라도 말해도 사람마다 뇌를 열더니 신 냄새를 욱여넣는다
지켜본 아이 얼굴이 붉다 신 냄새가 배어있다
-《나래시조》 2023. 겨울호
김태경 시인 / 무리한
이처럼 뜨거운 게 여름만은 아니라서
한 곳으로 걷고 있다 목적지는 없었는데 도로를 질주하는 차 뒷모습이 익숙하다 어제 같은 오늘 밤이 또다시 어제가 된다 틈틈이 돌아눕는 너의 인사는 편안한지 어제가 변주되면 기억은 좀 달랐을까 붕괴된 어느 시간에 향수라도 뿌릴 거야 목소리를 채우는 게 먼지는 아니어야지 우리 일화가 사라진다 불 속 같은 한 때라서
계절이 도드라지게 걷는 길도 한 방향이다
계간 『상상인』 2023년 여름호 발표
김태경 시인 / 밤거리, 거리
함께 걷던 거리에 거리가 생겼다
어린 네가 아프던 밤부터 시작되었다 마땅히 지켜야 했을 새싹 같은 연둣빛 잠, 멀어진 거리만큼 죽은 뿌리가 쌓여가고 만질 수 없는 것은 상처만이 아니었다 멀쩡한 무능은 두 눈을 멀게 만들어 먹구름 가득한데 날씨가 좋다 말했다 불통이 음산해서 여린 숨도 떨고 있구나!
새로 난 거리를 달려 별빛 찾는 아이들
계간 『시와 사람』 2023년 봄호 발표
김태경 시인 / 물꽃
놀랍게도 스스로 물을 만드는 꽃이라지
물 주지 않는데도 언제나 피어있지 각자의 슬픔을 돌아보는 어두운 밤엔 잎사귀 그물맥이 투명하게 반짝이지 오늘도 혼자 우는 사람이 있어서지 누군가의 눈물을 꽃병에 모은다지 물꽃의 줄기 따라 한 바퀴 돌고 오면 척박한 마음에 뿌리는 물이 되지 새가 나는 꽃밭을 가꾸길 바라는 거지 지금도 눈물 나누며 네 곁을 지키고 있지 -2022년 겨울호, 불교문예
김태경 시인 / 정전과 자정과 자전
암흑에 빠져들게 될지도 모르는데
따뜻하게 손잡아줄 뭔가가 올 것처럼 걷고 또 걸으면서 방벽을 닦아주면 눈물을 머금고도 눈물로 길을 적신 누군가의 불 꺼진 두 눈동자 보이는데 그늘이 밴 육체가 뒤돌아선 너일지라도 검정색은 빛깔과 무관하지 않으니까 내일이 될 이 순간 널 뒤에서 끌어안으며 두려움을 고치려는 별빛을 곱씹는데
밤거리 돌고 또 돌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2023년 봄호, 시와사람
김태경 시인 / 얼룩진 그림책
후회의 시간 위에 마른 잎이 쌓였구나
뒤늦은 사죄를 하고 울타리는 멀어지고
유년이 책이었다면 볕 아래서 펼칠 거야
화창할 날일수록 표정은 더 잘 보이지
뿌리가 자라나 봐 흙 내음이 나도 좋아
그림 속 사과나무가 꽃향기 퍼뜨리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김태경 시인 / 오후, 사다리
끝이 없는 사다리가 공중에 서 있어요 발가락에 힘을 주고 하나씩 올라갔더니 손등에 날씨가 묻네요 보슬비가 내려요
기울어진 직선 따라 어디까지 닿는 걸까 콧바람과 뒤섞인 바람결을 헤아려요 바닥이 구름이었나 겨드랑이가 뻐근하죠
중년의 한가운데서 푸덕이는 상상을 해요 파랑새는 표정 살피며 곰살궂게 저울질하고 누가 더 오래 견딜지 고개를 갸우뚱하지요
굳은살 박인 손을 뻗어 허공을 만져봐요 저 건너 사다리에서 이름 부르며 인사하죠 미소가 날개였나 봐요 손톱에 깃이 자라요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김태경 시인 / 진흙 인형
여자의 몸 한구석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네
원통 모양 수족관의 한가운데가 밝아졌네 작고 파란 물고기 미동 없이 떠 있네 무표정한 얼굴로 눈만 크게 뜨고 있네 가까이 다가가 찬 유리에 손을 댔네 물고기는 사라지고 파란 흔적만 남았네 수술실 앞 의자에서 억지로 웃어 보였네 그만 웃어 정떨어져 애 잃은 여자가 여자는 물고기처럼 파랗게 흘러내렸네 흘러내린 몸으로 인형을 다시 빚네 파란색 진흙으로 텅 빈 곳을 메우네
여자는 그렇게 영원히, 태몽 따위 꿀 수 없었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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