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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제욱 시인 / 달의 사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9.
김제욱 시인 / 달의 사전

김제욱 시인 / 달의 사전

 

 

여행은 제목 없는 책들을 데리고 혼자 떠났다.

 

높다란 첨탑까지 책을 쌓으면 수평선 너머를 굽어볼 수 있을까.

궤도에서 이탈한 시간이

바람의 탯줄을 따라 증발하는 것을 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린다.

너는 책 한 페이지보다 더 가벼워질 거야.

 

굽이치는 길에 쓰러진 책을 일으켜 세우면

사라진 문장 사이 평온한 모래가 아삭거리지.

쓴다는 것은 백지 위에 이빨자국 내는 것이라 생각해.

바람에 물린 살점이 아득하다.

 

상심한 별이 불안을 연주하는 시간,

책장을 덮고 잠이 들면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려.

잠결 허리춤에서 자란 나무들이

초록 비명을 터트리지.

내 노래는 슬픈 입모양으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곤 했어.

 

그것은 너였을까.

화관을 쓴 마리오네트.

 

그대가 달빛에 엮인 실을 발견한다면

책과 램프와 책상이 떠올라

구름 저 편으로 춤추며 날아가지요.

목소리마저 베일에 가려 도란거린다.

 

여행이 갈림길 표지판에서 사색하기 몇 번,

닿는 시선마다 책장이 펼쳐져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백지를 지나왔지만

책갈피에 꽂아둔 심연의 달빛은

뒹구는 구두에 담기기도 하는 것이다.

 

-웹진 『문장』 2010년 3월호 발표

 

 


 

 

김제욱 시인 / 관광안내문

 

 

섬으로 들어가는 당신에게 주의사항을 알려드립니다.

유리알이 쏟아지는 대합실 창문을 조심하세요.

투명한 행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거든 눈을 감으세요.

참을 수 없이 귀가 간지러울 수 있습니다.

의자 위에 수북이 내려앉은 먼지는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바다 속에 잠긴 악사의 짙은 숨결입니다.

당신은 아마도

바다의 계단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대하지 마세요.

쪼개고 바라보고 하여도 당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똬리를 튼 퍽퍽한 파원 뿐.

찰나를 엿보는 행운이 당신에게 있다면

서편 노을로 사라지는 글자들의 군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눈부신 책장을 펼쳐놓고 오래 서서

담담하게 바다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거품 같은 시간을.

하지만 기대하지 마세요.

늦은 의자에 하루를 앉히면

시간은 모래알처럼 메말라 흩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등대가 깜박이는 심장을 아무리 열고 닫아도

하루는 흐르지 않아요.

벽은 이제 창문 너머로 어둠 저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소리의 방울이 솟아오르고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왔다 달아나고

파도가 삼킬 듯 부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놀라지 마세요.

우리의 생은 너무 짧고

창문의 미소는 착하지 않답니다.

배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당신의 대합실은 섬을 찾아

의자 주변을 맴돌겠지만

더는 하루가 흐르지 않아요.

 

-《시와 미학》2012년 가을호

 

 


 

 

김제욱 시인 / 경계인

 

 

 그날부터 빗금으로 서 있는 사람이다. 외침이다. 지나치는 사람이다. 둘레를 배회하는 사람이다.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내미는 얼굴이다.

 

 스스로 경계에 갇힌 놀라움으로 벽이 숨통을 죄어오는 공간에 산다. 이곳도 아닌 저곳도 아닌, 어둡고 습습한 시야의 틈에 걸어 들어간다.

 

 찬 공기가 살 에이듯 감은 눈으로 겨울이 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

 바람을 넘어서며 벽에 부딪치는 투명한 겨울 사람.

 뜬 눈으로도 들을 수 없는 이름.

 떠돌다 죽어버린 바람결 곁에서 결빙된 언어를 녹이는 사람.

 그대가 스쳐 간 투명한 자리를 맴돈다.

 찬 불빛의 고요함은 너무 아름다워. 나지막이 나에게만 들리는

 따스한 온기의 목소리.

 폐부 깊숙이 스미는 사이렌의 노래.

 그때의 감정은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 아니냐고

 텅 비어있는 말라버린 눈물의 흔적 같은

 언 손을 내밀어 본다.

 벽의 어둠이 드러날 때까지 외친다. 듣는다.

 

 그날의 눈알을 빼서 창밖에 걸어놓았다. 집 근처 서성이는 겨울의 그림자가 있다. 산화하는 노을빛으로 잠긴 다리. 휘발하는 글자 사이 빈 곁으로 경계인이 걸어간다.

 

― ≪시향≫ 2020년 봄호

 

 


 

 

김제욱 시인 / 뿌리 깊은 달

 

 

소용돌이 휘말려 대가리 박살났을지라도

산산조각 다시 뭉쳐

강물의 호수의 바다의 심장이 되는

 

늦가을 어스름이면 쩌렁쩌렁

더욱더 불타오르는

그물로 작살로도 건질 수 없는

눈으로만이 만질 수 있는

오로지, 오직 한 마리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

산 넘어 또 산 넘어 서방정토까지 혼자이지만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

 

실개울에도 흐르고 있어

우리들 가슴에도 뿌려져 있어

내 인생 견문록 참회록에도 새겨져 있어

 

천천히 찬찬히 구름과 바람 사이를

온밤을 꿋꿋이 돌보고 있어

 

-시집 <뿌리 깊은 달>에서

 

 


 

 

김제욱 시인 / 나의 작시몽(作詩夢)

 

 

선택한 길은 늘 외롭고 멀다

시 향해 기도하고 시를 위해 걷는다

하루의 첫 시간과 마지막 시간

자투리 시간도 거기 바친다

시로 인해 천국을 알며 미혹에도 빠진다

영혼을 앓게 하고 자라게 하는

시 안에서 나는 수녀다

세상일 몰라도 그뿐

주어진 만큼 허기지고 빈 만큼 꿈꾼다

시는, 내 신앙이며 궁극이다

 

 


 

 

김제욱 시인 / 음악시간

 

 

멜로디가 어지럽던 시절아.

그래 난 말이야.

B♭많아 휴식이 필요했어.

 

음악소리에 지쳐 잠들면 행간에 뛰어들어

사유의 대화를 엿듣곤 했지.

 

왜 사람들은 반올림을 좋아하는지.

비명 섞인 B♭을 싫어하는지.

 

1교시, 2교시, 3교시를 건너

리듬을 가지고 놀래.

 

똑같은 질문과 대답에도

인생에 반복이란 없어.

젖은 사유는 늘 자리를 달리하지.

 

한순간 나타났다 완전히 사라지는

저 붙잡을 수 없는

박자도 리듬도 숨 막히게

영롱한 단선율의 초월성이 좋아.

 

스피커 찢어져라 음악의 천장을 열어라

사유가 음표를 지니고

오선지가 달아나는 날까지.

 

침묵하는 피아노야

부식하는 자물쇠를 해머로 진창 부셔줄게.

 

나는야 피아노 치는 시인.

시도 부르고 음악도 쓰는 사람.

갓 태어난 아들도 시가 되어 고민인

나는야 피아노 치는 가장.

 

저물녘의 어스름도

아기의 귓가에 앉혀놓고

반음 내려앉은 햇살을.

건반에 담아 아지랑이를 연주해요.

 

활자들 스타카토 리듬을 타고

가끔

노래가 침대가 되고

피아노가 시를 쓰는

나는

언제나 음악시간.

 

 


 

 

김제욱 시인 / 天葬師의 중얼거림을 듣다

 

 

어제 난 분명

잃어버린 너에 대한 슬픔에 지쳐 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난

그때의 폐허,

너의 눈빛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잠의 그림자가 몸속 깊이 나른함으로 퍼지자

그 눈을 감는 순간

한 시절의 축대가 무너진 것이다.

 

단지, 기억을 죽음으로 이끄는

언덕 위 저 천장사의 음영을 바라본다.

 

몰려오는 독수리 떼를 쫓으며 그는

밤사이 내 걸어온 어제의 길을 지운다.

침대 머리맡에서

기억의 정수리에 올라앉아 너를

지우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에선 들짐승처럼 요란한

빈 동굴의 비명이 새어나온다.

 

쾅!

 

성자가 내리치는

뼈마디 소용돌이 따라

점점 더

해머에 분쇄되는 비명들.

- 태초에 언어가 있었다면, 그것은 단말마의 외침일지도 모른다.

 

자연이 주신 숭고한 손길로

기억을 하늘 위로 올리는 중이다.

머리 위에 맴돌던 독수리 떼가

피비린내 나는 천장단상에

먹구름으로 가득 모여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로를 할퀴며

내 말랑한 뇌에

깊숙이 부리를 박고

너와 내가 몸에 아로새긴

문신의 기억을 깨끗이 파먹고 있다.

 

웅얼웅얼 대는 중음계의 말소리.

뼈마디를 분쇄하는 천장사의 준엄한 망치질 소리.

먹이를 놓고 싸우는 독수리 떼의 요란한 울음소리.

식은 땀줄기로 흥건한 지난밤 내 신음소리.

 

이제 추억이 남긴 잔해의 기억은

더운 입김이 묻어 있는 해체된 살점들.

그 뿐이다.

 

온몸으로 포갠 죽음이 폐부의 깊숙한 곳까지 스미도록

밤하늘을 너 대신 짙게 껴안았다.

 

놓치기 싫은 잠결의 언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풍의 눈을 삼킨 천장사가

天葬을 기다리는 亡者의 침묵으로

독수리와 함께 하늘 높이 사라지고

 

고요한 햇살이 내 이마 위에

성자의 옷깃 스치듯 떠오른다.

 

미안,

어젯밤 네 손을 놓치고 말았어.

 

 


 

김제욱 시인

1976년 서울에서 출생.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고려대학교 문학예술학과 석사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2009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에 〈라디오 무덤〉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2011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 현재, 협성대학교, 한서대학교, 성결대학교 등에서 강의. <시를사랑하는사람들> 편집위원. 시집:『라디오 무덤』(현대시. 20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