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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초 시인 / 까치 독사
산과 산 사이 작은 마을 위쪽 칡넝쿨 걷어낸 뒤뙈기를 둘러보는데 밭의 경계 삼은 왕돌 그늘에 배 깔고 입을 쩍쩍 벌리는 까치독사 한 마리 더 가까이 오면 독 묻은 이빨로 숨통을 물어뜯어버리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설 줄도 모르고 내 낌새를 살핀다 누군가에게 되알지게 얻어터져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데 꺼낸 무기라는 게 기껏 제 목숨뿐인 저것이 네 일만은 아닌 것 같은 저것이 저만치 물러난 산그늘처럼 무겁다
이병초 시인 / 만남
들몰댁은 또렷하게 나를 기억했다 찜질복 아래 드러난 살진 무릎이 희디희어 내가 되레 무안했다 뭐하고 사냐 자식은 몇이냐고 묻는 말 속엔, 어떤 놈 후리러 왔냐는 삿대질에 몰려 누런 백열전구 아래 빨래처럼 널부러졌던, 깜밥 달라고 생솔냇내 묻어 있던 살결에 무작정 뛰어들었다가 그 품에 안겨 소리죽여 눈물 흘리는 그 품에 안겨 가슴 두근거렸던 사십여 년 저쪽이 걸어나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는 코흘리개를 붙잡고 "아비 묻힌 데서 보면 저 멀리 고라니가 보리밭 일곱 고랑을 뛰어넘고 아지랑이가 나비수저로 팔랑팔랑 시냇물을 떠먹었지 아비 브러 가는 길에 털비지 근 반 끊어와 잉걸불 뫼고 옻순에 싸먹음서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게 아비는 나보다 덜 심심하겠다 이런 생각도 했지 눈 깔고 얘기할 땐 숨이 가늘어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전주 형무소에 갇혀 있던 아버지가 6.25전쟁 직후 소리개재에서 총살 당했다는 것과 그때부터 그녀는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씨도 못 받고 호미 품이나 팔며 떠돌았다는 것을,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이런 사정을 다 짐작하는지 들몰댁은 입을 조금 벌리고 잠들어 있다 쓰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약 기운에 취해 벼랑으로 달려가야지 살아갈수록 뒤가 허한 공복감을 보리개떡같이 물고 어금니를 깨물어야지 한중막 속에서 벌떡냈던 내 엄살을 빨아들이며 곤히 잠들어 있다 내 어머니였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던 들몰댁
이병초 시인 / 2015년 9월, 교정에서
재임용 취소 통보장을 되돌려주기 위해 학교에 왔는데 키 박스를 바꿔놔서 연구실 문이 안 열린다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비 냄새 묻은 바람이 볼을 스친다
조금 있으면 입술을 뾰족하게 세운 빗소리가 또옥똑 연구실에 스밀 것이다 이 의자에 앉아 혹성탈출이란 말을 턱에 문지르던 사내는 어디 갔나 창틀에 구슬구슬 맺힌 이슬의 문장 앞뒤를 짯짯이 훑어 강의 준비하던 사내는 어디서 빗소리를 또옥똑 분지르나 금승리 안개를 찍어 쓰다 만 편지와 담배꽁초 수북한 재떨이 옆에 재임용 취소 통보장을 웅지법인에 되돌려주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다, 라고 흘려 쓴 글씨를 매만지며 빗소리는 뾰족한 입술을 더 뾰족하게 내세울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오는 중인가 돌아가는 중인가 우수수 나뭇잎들을 흔드는 바람소리 해직된 사실을 깜박 잊어먹은 바람소리에 대롱대롱 빗방울이 매달린다
이병초 시인 / 문병
울 엄니 순창서 시집오시어 일만 벌였다 하면 꼬라박는 아버지 꼴 보시고 다섯 새끼 가르치시느라, 봄이면 묵은 김장독 헐어 문전문전 다리품 파셨네 중앙시장 맨바닥에서 무더기 무더기 채소 파셨네 호각을 불며 순경이 들이닥치고 늘어놓은 오이 가지 깻잎들 순경 발길질에 사정없이 걷어차이고, 왜 이러냐 사람 먹는 것을 왜 걷어차냐 당신은 새끼도 안 키우냐 악 쓰시던 울 엄니, 집만은 안 된다고 이 땅만은 안 된다고 플라스틱 쓰레빠 한 켤레로 해를 넘기고 또 넘겼어도 쓰레빠만 닳았던 울 엄니 삶의 평坪 수, 연탄화덕에 코 박고 싶다고 띄엄띄엄 애간장 녹으신 보리쌀 두어 됫박도 무섭게 알고 세월 건너오신 울 엄니 풍 맞으시어 병상에 누워 계시네 못 믿을 큰자식 손을 붙잡고 비스듬히 웃으시네
이병초 시인 / 물개똥과 자전거
방귄 줄 알고 엉덩이에 힘을 팍 주니깐 와락 물개똥이 쏟아졌던 거라 순간적으로 바뀐 내 표정에 너 쌌지 짜식들이 입 까불러대며 방 밖으로 내쫓는 거라 별 수 없이 밖에 쫓겨나 팬티 갈아입으러 집에 가려는데 타고 왔던 자전거가 보이는 거라 옳지, 집에 얼른 가고 싶은 욕심에 자전거에 올라탔는데 이런, 물개똥을 싼 채로 안장에 앉을 수가 있나 엉거주춤 페달을 밟고 서서 깔짝깔짝 앞으로 노를 젓는데, 짜식들이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라 배꼽잡고 뒹구는 거라 에라 잡것, 안장에 뭉개고 앉아버렸는데 짐받이에 눌려 휘어진 뒷바퀴가 나를 태우고 잘그락달그락 밑돌리는 거 같다는 거라 어쩔끄나 저러다 또 싸면 어쩔끄나 염병뗌병을 떨었던 거라
-[시평] 2002년 겨울호
이병초 시인 / 이사
부엌짐 라면박스에 싼다 쓰다 만 화장지도 덜덜거리는 선풍기도 싼다 혼잣몸 뒤치락거리다 옆구리에 혹이나 생긴 보따리들, 귓바퀴에 모여드는 새소리들 담배집 너머로 반짝이는 별들 지게 바작에 곡괭이짐처럼 무겁다 티눈 박힌 시간들 손톱깎이로 파내며 파낸 자리 성냥불로 지지던 목마름 굴속 같은 이 방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지지던 목마름, 앞방죽에 뜬 불빛들 영수증들, 약봉지들로 도배된 내 방은 생솔가지 타는 냇내가 없다 농 들어낸 자리에는 검정나방들이 함부로 널려 있다 몸통과 날개를 저렇게 따로 벗어놓고 어디로들 떠나갔는가 검정나방의 허물을 쓸어 모으며 이불속처럼 쑤셔박힌 내 한뎃잠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
이병초 시인 / 눈 내리는 밤
제때 죽지 못한 슬픔처럼 숫제 알몸띵이로 펑펑펑 함박눈 쏟아진다 외등 낀 탱자나무울타리 위로, 짝발 짚고 선 지게 위로, 뒷바퀴 주저앉은 짐빠 위로, 우우웅컹! 문창을 때려 쌓는 개 짖는 소리 위로 펑펑펑펑 함박눈 쏟아진다 미치게 살고 싶었던 꿈자리들이 펑펑펑펑 쏟아진다 놋요강 놋대야 새로 들이고 자식 보고 싶은 밤, 산도 들도 지붕도 길바닥도 평등하게 눈 덮일 눈부신 아침을 펑펑펑펑 출산하는 밤, 질긴 명줄이 다녀가는지 간혹 정짓문이 삐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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