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란 시인 / 당신이라는 간이역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늘도 인연이라는 완행열차를 타고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간다 시간이 지나가는 길목엔 처음 같은 두려운 풍경이 기다린다 어느 날은 대낮의 플랫폼에서 아직은 낯선 당신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어두운 대합실에서 연착을 알리는 당신의 깃발을 찾기도 한다 당신은 나를 가벼운 눈길로 배웅하라 뜨거운 악수는 생략되어도 좋다 진한 이별의 말은 나누지 않아도 좋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많은 날들과 당신을 만나고 돌아선 많은 날들을 천천히 기억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리니 당신의 이름이 과거로 명명됨을 슬퍼하지 마라 또 다른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나는 당신의 눈빛에 이 말 한 마디를 남겨둔다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추억이 된 당신이 못내 서러울 뿐이다
이미란 시인 / 야사록
소풍처럼 왔다가 사라져간 바람처럼 한줄기 문장으로 남겨지기는 싫었어 해지는 쪽의 풍경을 사랑한 꿈의 마리서사, 전차바퀴에 매달린 흑백필름의 골목과 안개의 무적 속에서 숙녀의 옷자락을 노래하던 그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명동백작의 버버리자락을 따라가던 날부터 온 생을 필사하듯 검은 운명을 필사하기 시작했지
오늘도 내 책상머리엔 바람의 탁본과 구름의 한자사전을 부유하는 먼 여인의 거문고가 살고 있지 어둠속 집어등처럼 눈 부신 그녀의 손가락이 슬픈 운명의 거문고를 뜯으며 인연이라는 암각의 활자와 고독이라는 호리병의 낱말 사이에서 불면이라는 사내의 옷소매를 살포시 걷어주며 주고받던 문방사우 놀음을 어찌 잊을 수 있겠어 그로부터 천년의 시간을 얻은 그녀가 빛바랜 거문고 위의 화톳불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글줄께나 쓴다는 여인네들은 모두 다 아는 이야기지
달빛이 제 몸을 풀어 두루마리 연서를 쓰는 밤이면 내 이지러진 머리 위엔 검은 밤의 울타리가 피어나지 그대에게 부탁이 하나 있다면 세월의 돌탑 사이에 끼여 있는 백석의 시간을 빼내어 내 슬픈 전쟁이 따라간 그 겨울의 마리서사, 덕담의 백열등 밑에서 후생을 기약하던 옛사람들의 탁자에 애증의 김이 서린 돌팔매의 추억 한 접시 날려주렴
손톱 위의 하현달처럼 돋아나는 시인들의 나라에서 구름의 이마를 뚫고 자라난 푸른 그리움이 아침 열시의 서쪽에서 이글거릴 때 다시 천년의 시간을 얻은 나는 먼 옛날의 은행나무 숲을 떠돌던 한 여인의 거문고로 환생하리니 난공불락처럼 잘난 세월의 콧잔등을 타고앉아 달콤한 향유의 말로 그대를 이끌어 오랜 기다림의 달빛을 머리맡에 풀어놓고 문방사우 짙은 재회의 옷소매를 살포시 걷어주며 양귀비꽃처럼 붉은 잇몸으로 온 밤새 운우지락의 정을 나누리니
이미란 시인 / 내 몸 안에 세상의 모든 길이 숨어있다
때죽나무 곁 그 길의 시작은 포도청이고 가시나무 곁 그 길의 끝은 변기뚜껑 속이다. 늑골 아래 세 든 저수지 물빛이 흐린 날이면 남서풍의 창문을 읽고 가는 편두통의 바람은 슬로우 모션의 뒤통수만 보여준다.
타클라마칸의 모래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등을 타고 앉아 왕오천축국전의 두루마리 경전을 훔친 적도 있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으로 떠나간 순례의 잠을 기다리던 밤이면 내장 깊숙이 박혀있는 동굴의 입구엔 별이 뜨지 않았다. 자물쇠가 채워진 척추의 중심을 지나려면 캄캄한 공복의 틈 사이로 정갈한 솜씨의 식칼을 꽂아야했다. 치사량의 위풍당당 장마가 숨겨진 애인처럼 찾아들면 출처를 알 수 없는 통증이 배꼽을 지나 자궁 벽 깊이 심어놓은 우물의 천정에 페니실린보다 독한 옛사랑의 주사바늘을 흔적도 없이 찔러놓곤 했다.
내 몸이 곧 길이다, 라고 믿기 시작하면서 그 길의 끝에 다다르기 위한 맑은 강물을 퍼 마시며 시린 모래바람에 늘어난 달빛의 혓바닥을 등에 지고 잠드는 낙타의 긴 속눈썹을 사랑하게 되었다.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중 서번가는 사신을 만나' 라는 시의 일부,
-시집 『내 남자의 사랑법』에서
이미란 시인 / 푸른 소멸
또 다른 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골짜기마다 빛나던 하루가 저물었다 새가 흐르고 별이 울고 떠나야 한다는 목적도 없이 바람은 언제나 서쪽으로 날아간다 갑옷을 입은 그리움이였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복병의 세월이였다 노래가 두려운 행진은 없으니 앞으로 앞으로만 가라 시작도 끝도 없는 먼지처럼 눈물의 갈피마다 묻어둔 악수를 풀고 돌아보지 말고 흐르고 흘러라
이미란 시인 / 내 남자의 사랑법法
돌아누운 그의 등줄기 사이로 바람이 분다 그 바람벽에 살을 묻고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온전한 그림자의 알몸을 그의 등에 비비며 축축한 암술로 돋아나는 회한을 가닥가닥 엮어서 그의 등에 암각된 성난 뿌리를 토닥이다가 잃어버린 모성의 숲 내버린 젖무덤 사이에 이 세상 가장 편안한 숨을 내려놓게 해주었던가?
미안한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내 남자의 등에 접혀진 얼룩무늬의 날개를 본다 나달나달하게 식은 깊은 뒤란의 날개 속엔 오랜 세월의 먼지 속에서 골라낸 성근 햇빛과 달의 골수로 길러낸 사향노루의 주머니와 첩첩한 소금 창고 속 항아리 밑에 묻어둔 그만의 활홀한 비문이 숨어있을 것이다 그 맨홀 속 같은 그리움의 뚜껑을 열고 들어가 별빛을 조명삼아 뒹글어본 적이 있었던가?
미안했고 미안했던 당신, 이라고 불러본다
밤의 창문이 가로등 불빛을 포개며 드러눕는다 저만큼 밀려난 등과 젖가슴의 간격이 휑하다 그의 등을 타고온 마른 바람의 숲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구석기 시대처럼 멀고 먼 야성의 무덤 같은 동굴의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거기 한 사나이의 꿈이 굽은 세월로 박혀있다 전생의 못다 푼 밀렵의 화살을 당기며 동굴 속 벽에 사향노루의 들판을 새겨 놓는다 거꾸로 도는 시계를 따라 해바라기처럼 퍼져 나가는
내 남자의 등에 매달린 빛나는 암각의 사랑!
-시집 <내 남자의 사랑법法>에서
이미란 시인 / 햇빛 속으로 걸어갔다
다음 생에는 햇빛으로 올 거야 언제나 바람이나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돌다가 소멸하는 낮고 흐린 생을 노래하곤 했지만
다음 생에는 꼭 햇빛으로 와서 음습한 그늘 밑 갑각류의 벌레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흐느끼는 젖은 영혼들의 굽은 등을 달래줘야지
비타민 D가 절실히 필요한 세상이야 자외선의 공포도 무섭지 않아 기미나 검버섯의 침입도 두렵지 않아 정오의 벤치에 앉아 기타를 튕기며 오후로 짙어가는 그리움을 노래해야지
이번 생은 너무나 어두워 우물처럼 축축한 눈물만이 친구야 광합성의 미소를 환하게 날리며 다음 생에는 반드시 햇빛으로 올 테야
이미란 시인 / 생이라는 우주엔 찰나가 산다
당신이 내 첫 번째 생의 줄거리를 읽어가는 동안 찰나의 우주 정거장을 여행하고 돌아온 두 번째 생이 당신이 서 있는 무대 아래 일찍이 당도해 있다
모든 생은 윤회한다는 말을 전부 다 믿지는 않지만 발화하는 생의 배꼽에는 우주의 탯줄이 닿아있다 찰나의 손잡이를 순진무구하게 지켜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몰의 연대기를 따라가면 종결어미의 명령조로 심판하던 당신의 지팡이가 있다
찰나와 찰나 사이에 우주의 바깥을 여행하고 온 생을 고즈넉한 등불에 매달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원의 터널 속을 통과의례의 기침으로 지나가는 바람의 페이지가 접어놓은 수많은 풍경이 보인다
그러니 이 질긴 윤회의 동아줄을 끊을 수 있도록 살았던 모든 잠의 기억과 달콤한 세계를 잊고 찰나와 영혼으로 매달린 수많은 생의 그네를 귀밑머리 잠의 허공을 밀어 올리듯 가뿐하게
-『PoemPeople시인들』 2022-여름(창간)호 <신작시> 에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영숙 시인 / 흘러가는 시에게 외 6편 (0) | 2025.10.19 |
|---|---|
| 김태경 시인 / 포도라고 말해도 외 7편 (0) | 2025.10.19 |
| 김후영 시인 / 잃어버린 하늘 외 6편 (0) | 2025.10.19 |
| 김제욱 시인 / 달의 사전 외 6편 (0) | 2025.10.19 |
| 전근표 시인 / 부부의 인연 외 6편 (0) | 2025.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