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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선 시인 / 파블로프의 개
새벽 두시와 세시 사이 미생물처럼 꼬물대는 시계초침과 관현악 사이 만기 지난 여권과 무기한 미국비자 사이 혀 빼물던 여름과 늦장 떠는 가을 사이 틈 없이 비만해져 가는 미묘한 무늬들
들끓는 주전자의 욕망 뜨거운 수증기거나 입김이거나 아니거든 냅다 지나쳐버리기 일쑤인 버스이거나 막차를 놓친 낡은 한 켤레의 밤이거나 모두가 낯익은 버릇과 방식에 시달리는 독존의식
그 불가침의 절정을 툭툭 분지르며 딸랑딸랑 딸랑딸랑 당신이 돌아온다, 지금 되돌아온다.
겸손한 당신의 스텝은 달콤한 탱고 뒤뚱대는 엇박자
당신이 흘려놓은 마지막 리듬 같은 부화의 물꼬-종소리를 향해 기우뚱해진 웃음을 말고 나는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어디서 결례의 시간들이 돌아오고 있다.
ㅡ 2009년 《다층》 가을호
채선 시인 / 간이역
먼 기억의 전조등이 켜지고 서서히 숨을 고르며 열차가 도착하고 있다 잦아드는 기적소리가 채 아물지 않는 날들을 어둠 속에서 발라내는 시간
시간에 매인 채 거리로 쏟아지는 무표정한 사람들 사이를 떠돌던 아주 오래된 바람 한줄기 황망히 열차에 올라 텅 빈자리에 몸을 부린다
모두 혼자가 되는 시간 차창 밖 수은등 주위로 몰려드는 하루살이의 젖은 날개와 완강한 어둠의 위태로운 곡예
어둠의 깊은 날숨들 모두의 귀를 막아버리고 누구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생각일 뿐 소리가 없다
다시 묵은 상처를 흔들며 울리는 기적, 열차는 묵묵히 육중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어둠 속 흩어진 시간에 빗장을 지르며 철커덕, 철커덕...
지금 生의 비린내를 풍기며 마흔 여덟 번째 열차가 떠나고 있다
채선 시인 / 저승에서 따라온 웃음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필경 어느 것의 끝이었을 마침표였는지도 모른다
바람 끝을 헤매다 내게로 왔을지도 모를 우연은 아니었을까 먼 흙바람 속을 거슬러 와서는 먼지로 내려앉아 신음하는 이 성가심의 존재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끝을 물고 이어져 내딛었을지도 모를 어미의 뱃속 뼈를 틀어가며 피에 섞여 쏟아져 내린 내 첫 울음은 저승에서 따라온 누군가의 웃음은 아니었을까
말랑말랑한 내 등을 떠밀며 혀를 날름거리고 게워냈을 웃음
그러다가
내 안에서 하나가 되고 내가 되고 결국 독이 되어 처형당하고 말
납빛의 아득한 시작
탄생
그것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
채선 시인 / 모사(暮思)
박제된 짐승의 눈에 저릿저릿 흘러드는 전류 같은 석양
오장 다 들어낸 거죽에 한겨울 누렇게 마른버짐으로 핀다. 총알의 속도만큼 빠르게 몸을 빠져나간 외마디 비명 토악질로도 쏟아지지 않는 필사적으로 물고 있는 식욕 같은 살아 있는 날의 망상들 박제된 야성에 갇혀 우우 거리는데 뒤늦게 달아나는 자세를 취하는 그림자에 총 맞은 자리 선명하게 비친다
채선 시인 / 쓸쓸한 욕망
빗길에 미끌려 간 저수지 도로에서는 시든 욕망의 자동차들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식당 앞에 부려져 기지개를 켜던 욕망들은 위대한 식탁을 위한 메뉴를 주문 당한다.
호박스프를 주문 당한 호박 같은 아줌마 새우스파게티를 주문 당한 새우눈 아줌마 마늘빵을 주문 당한 마늘 까던 아줌마 붉은 와인을 주문 당한 붉은 입술의 아줌마
아줌마를 아줌마라 부르지 못하는 웨이터는 사각 냅킨 같은 등을 새우처럼 조아린 채 오늘의 점심특선메뉴를 찬양하는 예스 예스 예스... 예스맨이 되었다.
두 잔째 커피를 주문하며 두 번째 화장실을 다녀온, 그때마다 볼 일을 보지 못한 맨손을 씻고 가그린 양치를 한 쓸쓸한 욕망 떠내려 갈 것 없는 양변기 속 무료한 얼굴로 떠있다.
채선 시인 / 봄비
긴말이 필요 없다는데 자꾸만 비 내리고 더 듣고 싶지 않다는데 자꾸만 비 내리고
너는 돌아오고 나는 떠나가고 헤어지려는데 헤어져지지를 않고
그만 오라는데 추적추적 너는 자꾸만 돌아오고 밤새 추근대던 비
듣기 싫다는데 자꾸만 발가락을 들이밀며 속삭여대는
채선 시인 / 봄 인사
나의 여행 시간은 길고 또 그 길은 멉니다.
나는 태양의 첫 햇살을 수레로 타고 출발하여
수많은 별들에게 자취를 남기며
광막한 우주로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는 것이 가장 먼 길이며
그 시련은 가장 단순한 음조를 따라가는 가장 복잡한 것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의 문에 이르기 위해 낯선 문마다 두드려야 하고
마지막 가장 깊은 성소에 다다르기 위해 온갖 바깥 세계를 방황해야 합니다
눈을 감고 여기 당신이 계십니다 하고 말하기까지
내 눈은 멀고도 광막하게 헤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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