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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사람 시인 / 춤추는 꽃의 밀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5.
김사람 시인 / 춤추는 꽃의 밀담

김사람 시인 / 춤추는 꽃의 밀담

 

 

허공을 마주하고 얘기하면

나의 말들이

이빨 없는 입술을 만들곤 했다

형상 있는 존재 들의 움직임은 왜 그리 여린지

 

허리 가는 여자

음악이 그녀를 만졌다

 

나는 죽어

현재를 농락하는 음악이 되었던 적이 있다

 

영혼의 실체는 음

악기는 영혼의 집

피가 고독한 사람은 영혼을 불러내곤 한다

 

지금 여기, 나는 살아서

밥을 먹고 구슬을 뱉고

커피를 마시고 꽃을 토하고

 

이웃집 신혼부부의 교성을 들으며

오래된 별자리를 찾는다

 

허리 가는 여자의 눈에서

음악이

글썽거렸다

 

 


 

 

김사람 시인 / 냉동인간

 

 

심장은 OC 이하에서 작동해요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준비가 필요하죠

생이란 순간적으로 뜨거워

금세 얼리기는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무작정 때를 기다리면

서늘히 식어 진물 흘리죠

남은 온기 사라지면

가장 얇은 틈 비집으며 파닥대는 그리움의 비린내

냄새가 나 냄새가 나 진저리치다 익사할지 몰라요

속을 서늘히 담금질할 시간이에요

냉기가 거미줄처럼 쩍쩍 들러붙어요

낡은 육체와 포화 상태인 기억,

불에 달군 바늘 끝 같은 그리움이

얼음 두른 박제가 될 거에요

사흘 동안 보관되다 마취 풀리는 날이면

나 또한 꽁꽁 얼어붙어야하겠죠

하늘에 새집 장만한 당신께

조만간 이사 간다는 편지 부칠게요

어머니 찬송가 안주 삼아 소주 드시다

입질 오면 주저말고 줄을 당기세요, 아버지

 

 


 

 

김사람 시인 / 무지개 속 어딘가를 헤매는 그녀를 위한 발라드

 

 

그녀를 생각하며 기타를 치자

하얀 손가락에서 무지개가 자랐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무지개가 뺏길 것만 같아

손을 뿌리쳤고 번개가 쳤다

 

물기가 있는 손은 조심해야 해

 

까만 눈을 가진 새가 하얗게 세상을 보듯

그녀는 내 눈에서 한참 무언가를 찾았다

몰래 숨어 읽던 포르노 잡지나

짝사랑해온 사람의 이름이 적힌 일기장이 없었지만

그녀의 속눈썹이 길게 떨어졌다

 

어젯밤, 폐에 구름이 내려왔어

걷어내지 않으면 몸 전체가 안개가 될 거야

 

구름은 지하에 있고 안개는 하늘에 있기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나는 떼를 썼다

 

고도를 착각한 구름은 이동하는 법을 잊어버려

가장 어두운 곳으로 마음이 향한대

 

가슴에 물기를 머금은 새는

둥근 돌을 토해내고 스스로 허공이 된다는데

당신은 늘 말라 있으니 무엇을 토해낼 거니

 

그녀의 가슴을 만지자

손끝에 매달린 무지개가 창백해졌다

겉과 속을 똑같이 만드는 위장술, 하지만

속 색깔을 모르니 보호색을 만들 수 없었다

그녀의 폐가 가슴 밖으로 반쯤 튀어나오고 있었다

나에겐 무지개라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난 밤마다 태양과 함께 실종되었고

아침이 되면 구름을 몰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아내는 말없이 이부자리를 깔았고

나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구름의 속살을 뜯어 먹었다

몸이 번데기 같은 무덤으로 변하자

아내가 무덤을 향해 차분히 총을 쏘아댔다

기타소리가 들렸다

섞이지 못해 낯선 색깔들이 구멍 밖으로 삐져나왔다

 

우리에게 무지개의 바깥은 없었다

 

 


 

 

김사람 시인 / 십자가 모텔

 

 

 남자는 엎드린 몸을 세웠다. 바닥이 젖어 있었다. 사제복을 입은 사내가 두꺼운 책의 각 페이지들을 바닥에 붙여나갔다.

 모텔 옥상에는 십자가가 반짝거렸다. 남자는 속옷을 입었다. 자라기 시작한 털이 따가웠다.

 차를 타고 새벽 6시를 관통하며 떨어지는 별들을 피했다. 아스팔트에 꽂힌 별 하나가 타이어를 그었다.

 차는 곧 안개로 변했다. 안개 속에서는 온갖 생물들의 감정들이 뒤엉켜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게 보였다.

 손에 찬 시계를 보았다. 바늘이 아직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첫사랑 여자가 사제복 입은 사내를 업고 남자 옆을 지나갔다.

 사내는 남자를 비웃는 듯 바라봤다. 남자는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사내를 향해 던졌다.

 열쇠는 꿈처럼 사내를 지나 첫사랑 여자의 뒤통수에 박혔다. 사내는 넥타이를 바로잡고 손을 흔들더니 강 위로 걸어갔다.

 바람을 탄 수백만 병아리 떼가 발밑으로 몰려들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한 발을 내디뎠다. 뿌욱-

 남자는 길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난 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간, 검은 고양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고양이는 발 주위에 번지는 피를 홀짝홀짝 빨았다.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갔다.

 남자는 신음을 길게 내뱉으며 새벽 6시는 왜 이리 지루하기만 한 것일까에 대해서 생각했다.

 

 


 

 

김사람 시인 / 토탈 이클립스 오브 더 헬

 

 

시간은 화합물이야

과거 현재 미래

후회 증오사랑

누가 나를 분리하는가

 

동물은 세 개의 눈을 가졌어

나를 보는 눈

너를 보는 눈 그리고

인간의 과거를 보는 눈

 

인간이 인간을 먹고 살아요

먹을 것이 사라지면

인간은 멸종할 겁니다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순간이

자기 시를 볼 수 있는 때야

 

-시집 <나는 당신과 아름다운 궁에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김사람 시인 / 잔혹한 플롯

 

 

누나는 종이 피아노로 레퀴엠을 연습해요

엄마 나이 쉰일곱 내 나이 스물일곱

처녀가 잉태하여 신을 낳을 무렵

엄마는 잉태하여 죽음을 낳으려 해요

나는 무서운 동생을 갖고 싶진 않아요

손자를 낳아 드릴 테니 몇 년만 기다리세요.

아빠의 신혼 첫날밤을 엿본

나는 혼이 날까 꼭꼭 숨어요

형님은 마당에서 세발자전거 타며

나를 찾아 헤매고 있어요

못 찾겠다 꾀꼬리, 날 위해 울어주렴

할머니가 내 머리카락을 발견하곤 소리쳐요

힘을 다해 퉤, 남김없이 뱉으세요.

간호사님 주사기를 빌려주세요

볼록한 엄마 배를 찔러

더러운 양수를 빼내야만 해요

정자 한 마리라도 남기는 날에는

은하수를 빨아먹은 별이

엄마를 죽일지 몰라요

내 고향인 얼음별이 서늘히 불타면

추워야 하는지 더워야 하는지 난감해요

아빠가 들깨를 빻으며 울고 있어요

태어난 그날에 나는 이미 죽었는걸요.

 

 


 

 

김사람 시인 / 영원을 부르는 벨칸토 창법

 

 

하드커버가 들썩거려요 마스께라!

무거운 뜻을 가진 가지가 우거지고

하늘보다 커다란 잎이 자라

활보하는 새들과 구름의 길을

모두 가려버리고 있어요

잎이 울음의 고체형이란 걸 안다면 마스께라!

나무에 기대어 울 자격이 있어요

울음에도 기교가 필요하단 걸 아나요

꽃이 죽고 새가 죽고 바람이 죽고

소리만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내 귀는 늘 젖어 있지만 아무도 몰라요

뼈가 흔들려요 폐가처럼 텅 빈 생각에도 흔들려요

나는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어요

미래는 딱딱하지 않았으므로 마스께라!

현재로 공명되지 않아요

내 마른 몸은 그림자로 채워져 있어요

호흡을 할 때마다 들락날락 나를 찌르는

딱딱한 그림자가 무서워요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날 이용하죠

나는 곧 버림받을 것을 예감해요

몸을 부비는 소리로 유혹하면 마스께라!

촛대에 검은 불이 붙어요

긴 시간을 흐르는 미성으로

당신이 오고, 떠나는 방식대로

내가 미쳐가고 있어요 마스께라!

—시집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에서

 

 


 

김사람 시인

1976년 경북 의성 출생. (본명:김진호). 대구교육대학교 음악교육학과. 2008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리비도' 同人. 시집 <나는 이미 한 생을 잘못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