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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시인 / 가을의 제사
아욱 줄기가 연해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제사도 머지않았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면 저는 시장에 나가 참조기와 백조기를 번갈아 바라보거나 알 굵은 부사를 한참 동안 만지다 내려놓고는
우리가 함께 신어도 좋았을 촘촘한 수의 양말을 무늬대로 골라 돌아오곤 했습니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에서
박준 시인 /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수록
박준 시인 / 84p
받아놓은 일도 이번 주면 끝을 볼 것입니다 하루는 고열이 나고 이틀은 좋아졌다가 다음 날 다시 열이 오르는 것을 삼일열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젊어서 학질을 앓은 주인공을 통해 저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서른 해 정도를 더 살다 갑니다 자작나무 꽃이 나오는 대목에서는 암꽃은 하늘을 향해 피고 수꽃은 아래로 늘어진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제가 전부터 알고 있던 것입니다 늦은 해가 나자 약을 먹고 오래 잠들었던 당신이 창을 열었습니다 어제 입고 개어놓았던 옷을 힘껏 털었고 그 소리를 들은 저는 하고 있던 일을 덮었습니다 창밖으로 겨울을 보낸 새들이 날아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온몸으로 온몸으로 혼자의 시간을 다 견디고 나서야 겨우 함께 맞을 수 있는 날들이 새로 오고 있었습니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박준 시인 / 연년생
아랫집 아주머니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마다 형 지훈이는 어머니, 어머니 하며 울고 동생 지호는 엄마, 엄마 하고 운다 그런데 그날은 형 지훈이가 엄마, 엄마 울었고 지호는 옆에서 형아, 형아 하고 울었다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문학과지성사
박준 시인 / 말
나는 타인에게 별생각 없이 건넨 말이
내가 그들에게 남긴 유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조금 따뜻하고 예쁘게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 남는다.
박준 시인 /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했다
박준 시인 / 파주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박준 시인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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