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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록 시인 / 그러거나 말거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6.
김록 시인 / 그러거나 말거나

김록 시인 / 그러거나 말거나

 

 

불이 불로 과잉이면

물은 물로 과잉이다

고통 가운데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태업 중인 항문에 비역질하며

네놈의 육봉으로 종이를 뚫는다

울먹이는 땀이 꼬르륵 납신다 에헴

모양과 빛에서, 변덕스레 허공이 된

이 미련한 고행자야

 

물의 과거에는 반드시 불이 손뼉 치고

툴툴거리고

불에서 불을 떼어 내느라 서로 목매다는 걸 어쩌랴

 

 


 

 

김록 시인 / 귀찮다!

 

 

아무것도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이 없다,

귀찮다

있어 왔던 생각

있어 왔던 말

있어 왔던 믿음

있어 왔던 우리는 다시 하고, 느끼고, 믿고,

귀찮다

본래의 것을

우리가 본래 손에 쥐고 있어서

아무것도 우리는 귀찮게 하는 것이 없다

아무것도 우리를

 

아무도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니,

귀찮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말하고

혼자 길을 걷고

혼자인 내가 그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하니,

귀찮다

유일 존재인 내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만 시켜서

아무도 나는 귀찮게 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김록 시인 / 관능 속에서의 멈춤

 

 

  1

  실내는 어두워서

  나는 더듬었네

  (당신은 어둠에게 나를 보여 주려고 하였던 건가요?)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몸을 떨면서

  남자는 감춰 둔 성냥

  자신의 심장에 그어

  밝혔네

 

  나는 겉옷을 단정히 빼앗기고

  4박자를 신청받았네

  남자의 발등을 탄 어색한 음악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나의 입술을 태울 듯이 쓰러뜨려,

 

  치아는 다물렸지만 침과 타들어 가고

  침이 치아를 다 녹은 뒤에

  불꽃이 서로 엉켜 버렸네

 

 

  남자는 탐미하고

  나는 이상하여

  죽은 듯이 경탄하였지

 

  옷끼리 서로의 소재와 감촉을

  하나하나 확인하다가

  남자는 마침내 미쳐 버렸네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남자는 너무 미쳐서

  자신의 옷을 냅다 동댕이치고

  대신 내 옷을 가지려 했지

 

  내 옷을 사정없이 들이마시고

  부드럽게 거부하는

  단추들을 입술로 물어뜯었네

 

  내 손은 잠자코

  강산을 지켜보다가

  남자의 속삭임에

  그만 깍지 끼었네

 

  가, 나, 다로 추궁하는

  남자의 논리에

  나는 매혹당하네

 

  남자는 그렇게 몇 번

  내 입술에게 말을 걸고

  나는 다물린 생각을

  남자에게 주었지

 

  한동안 남자는 그걸

  혀로 달래고

  계속해서 다독다독

  맛을 다셨네

 

  남자는 또 물었네

  아,

  점점 질문이 길어지네

  나는 갈수록 쩔쩔매네

 

  2

  나는 인정하였지

  그의 3박자 입놀림이

  공포마저 내쫓는구나

  그는 내 입을 물고 늘어졌지

 

  저런

  내가 답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내 혀를 낚아챘네!

 

  치아가 열리지 않아서

  타 죽어야 했던

  처음의 죽음과는 다르게

  이제는 불꽃이 두 개였다는

  기억이 없네

 

  그래도 찾던 생각은 그 혀 속에

  없었네

  나는 생각을 거기다

  감추어 두지 않았기에

 

  그는 삼킨 불꽃에

  차갑게 데었지

  오장육부가

  못다 춘 왈츠를 출 수밖에

  나의 눈물 반주에 맞춰서

 

  그의 코에서는

  불이 날름거리면서

  내 눈물을 닦아 주네

  너무 날름거리다

  나중엔 고는 소리를 내지

 

  나는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두고두고 슬퍼하리

  그가 뻗은 손바닥을

  깊은 우물로 아는 것도 모자라서

 

  몰래 눈물짓지

  그의 등뒤에서

  나는 그를 눈물로 겁탈하네

 

  3

  크게 혼쭐나기 전에 어서 도망가라고

  임은 타일렀지만

  나는 갈 수가 없네

  이미 쏟어진 속생각

  눈물이 핑계

 

  그러나 임은 벌써 곤하네

  요염한 눈물에 취해서

 

  밖에는 정적만이 우글거리고

  나는 여기가 안전하여

  잠시 몸을 숨기지

  원무곡이 천진하게

  임의 코에서 흘러나오는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이유를 대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임은 꿈에서 왈츠를 추나 봐

 

  함께 추려고 나는

  임의 손과 어깨를 찾았지

  임은 내 허리를 살살 꾀어

  꿈속으로 데리고 갔네

 

  4

  우리는 서로를 꿈에서나 알 수 있지

  그런데 임이 납치한 것은

  이번엔 나의 입술과

  손과 발

  그리고 허리뿐이네

 

  탐내고 있던 긴 머리카락은

  움켜쥐었을 뿐 가져갈 수 없었지

  온몸으로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촉감은 맨손에 맨발이지만

  곱이곱이 꿈길을 더듬어 지나는 동안

  맨손은 철장갑보다 두꺼워지고

  맨발을 거칠게 박자를 맞추고

 

  입술은 어렸을 때 입매,

  허리는 간지럼 타는 꼬마

 

  오오 거룩한 본능으로

  손과 발이 다 닳았네

  굳은살이 벗겨지고

  헌 살이 새 살이 됐네

 

  그러나 우리의 내일은

  시간이 없지

  나는 알리지 않았네

  임이 일어날 때

  깜짝 놀라,

  두 눈을 딱 감았을 뿐

 

  임의 입맞춤에 놀란 건 아니지

  임의 벌거벗음에조차도!

 

  반면 나는 중요한 몇 곳만

  가리지 않았지

  예뻐진 입술과,

  한결 보드라워진 손과 발은

  누드여야만 하지

 

  언젠가 다시

  임이 날 부를 때,

  임에게 답하고

  달려가서

  임의 손을 잡아 주기 위해

  아 그러나 우리에겐

  정해지지 않은 날조차 없네

  처음이 마지막이네!

 

  임은 내 팔을 잡는 대신

  쓰다듬기만 하네

  눈으로 애무하려는 듯

  달콤하게 쏘아보는 눈길을 받으며

  나는 떠나가네

 

  우리가 누구인가

  선뜻 우리에 대해

  기약하지 않네

  우리 둘 중 아무도

 

 


 

 

김록 시인 / 그리고

 

 

이곳의 숨겨진 말들은 물이 떨어지는 힘,

가장 높은 곳으로부터 나왔다

하늘이 검붉은 휘장을 두르고 있을 때

그 휘장 뒤에서는

이곳에 이르는 시선을 준비한다

그곳으로부터의 움직임은 머무르지 않고

이곳까지 엷게 퍼져 온다

 

휘장이 펄럭이는 순간,

거기에서도 이곳을 보는 것일까?

우리는 이곳에서 그곳을 보고 있다

정각(正刻)을 어긴 사물의

모서리들은 부딪치면서 구른다

구르다가

물과 함께 섞여 떨어지다가

 

사물들은 조용히 어둠을 맞는다

우리는 “아마 그럴 거야.”라고 말하지만

사물은 “다만 그럴 뿐.”이라고 말한다

별이 떨어지는 것은 정각에,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곳으로부터 그리고

그 후 다시 우리로부터 내밀한 외침이 계속된다

수레를 끄는 개의 눈동자처럼

쫓기는 휴식 속에서

순종의 그날이 오고 있다

긴 날들이 오고 있다

 

정각은 앙상한 낮의 등을 내리치는 채찍,

지상의 모든 물줄기를 내리치고

달리고 있는 태양의

늘어진 혀를 끊어 놓는다

무딘 꿈들을

드러난 말들을

 

마침내 정각은 내리쳤다

검붉은 휘장을 찢으면서 또다시

정시(定時)는 오고 있다.

새로운 광맥 위로 내리꽂으면

 

 


 

 

김록 시인 / 가혹한 분말

 

 

지금이 어느 때인지 모르겠다

이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렇게 끝나 버렸지만

그 끝은 그것이 그렇게 끝난 것이라는 시작일 뿐이다

모르기 시작한다는 것은 죽어 가는 것들에 대해 살아나는 것이다

이 말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만 말이 왜 이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

말 속에는 숨은 무거움과 숨은 가벼움이 있다

모든 말을 하고 있는 말의 가혹함은 그 말이라는 고전은

가끔씩 말의 의미일 뿐 사실 말하지 않은 말의 말씀이

나를 더 끈질기게 괴롭힌다

그것은 가끔씩 악의 의미일 뿐

 

 


 

 

김록 시인 / 순수성

 

 

밥은 순수하여 쉽게 똥이 된다

순수성이 해로운 것은

밥으로 끝나지 않고 똥으로 끝난다는 데 있다

순수성을 오해할 때 통 냄새를 의식하는 것이다

순수성이 거름이 되지 않으면

그저 똥으로 끝난다

 

순수성이 해로운 것은

똥으로 끝나지 않고 통파리를 불러들인다는 데 있다

그저 구더기로 끝날 수 있다

 

-시집 『총체성』 램덤하우스, 2007

 

 


 

 

김록 시인 / 원천

 

 

나무는 잠시 그늘을 보여 주었다

한 그루 침묵을 심으신 대지에 둘러싸여,

무성한 잎들이 더 사납게 새침 떼는 것은

아뇨, 난 그런 말 알지도 못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한 끝에

역시 그럴듯한 생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시무룩해졌다.

한 그루 생각을 심으신 바람에 둘러싸여,

무성한 잎들이 아까보다 더 사납게 새침 떼는 것은

내 생각이 맘에 드냐는 말에

아뇨, 난 그런 말 알지도 못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나무는 해를 기다렸다가 그늘을 바싹 구워 버렸다

아무래도 나무는 내 입까지 먹어 치우고 있다

아무래도 나무는 차근차근 내 가슴을 뜯어먹고 있다

아아 그래서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렸구나

 

-시집 『광기의 다이아몬드』 [열림원] 에서

 

 


 

김록 시인

1968년 서울에서 출생. (본명: 김영옥). 1998년 《작가세계》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광기의 다이아몬드』 『총체성』. 장편소설 『악담』 『나는 당신의 비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