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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훈 시인(평택) / 휘어진 시간
내 힘은 구부러진 곳에 있다
이곳은 화살처럼 튕겨나가는 이들의 순례지 유성처럼 불꽃을 튀기는 이들의 성지
보라, 지금 저기 원목을 메고 씩 씩 달려오는 이를
내 허리를 돌아 아슬아슬 죽음을 만끽할 것이다
-시집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 천년의시작
이윤훈 시인(평택) / 고공식사
불멸 거미가 가진 가장 슬픈 꿈 그러나 불멸 허공 높은 곳 거미가 집을 짓는 까닭
오랜 침묵 끝 날것들의 비상을 거머쥐고 오찬을 누리는 거미 날것의 죽음을 다시 빛실로 뽑는다
잡히지 않는 바람 그것을 자유로이 두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텅빈집
아침 천 개의 이슬이 눈을 뜨는 찬연한 그러나 불멸을 위해 허물어야 하는 집
이 적막한 눈부심 속의 고공식사
어쩔 수 없는 거미의 슬픈 작업 거미의 흔들리는 높이다
이윤훈 시인(평택) / 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거예요 -궁극적 실체에 관한 구름의 말
#마술
모자를 벗으며 살짝 인사를 하고 텅 빈 모자 안에서 마음먹은 대로 하나씩 꺼내기 시작하는 마술사
그대는 방금 무엇을 보았나요? -비둘기, 토끼, 장미?
텅 빈 모자를 쓰고 입에 초승달을 물고 마술처럼 사라지는 마술사
그대는 방금 무엇을 보았나요? -평화, 선, 사랑? -전쟁, 악, 증오?
#페르소나
차고 맑은 거울을 마주하여 비로소 목덜미에 곤두선 불안을 쓰다듬고 다독이는 그녀
붉은 손톱으로 시간에 맞서 끝없이 자신의 얼굴을 찾으려는
천의 얼굴이 다 그녀라는 것을, 그 천의 어느 얼굴도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막, 거울 속으로 들어서는
긴 손톱이 더욱 짙붉고 예리한
#理에 대한 헛된 고찰
반죽한 흙덩이 속으로 스미는 아이, 숨을 쉬기 시작하자 말랑말랑 살아 움직이는 반죽
흙덩이를 주무르며 또 헛되이 생각을 반죽하고 그 안을 열어보는 사내
흙덩이 속에서 나와 자신이 빚은 새와 같이 노는 아이,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그 안을 서성이는 사내
이윤훈 시인(평택) / 생의 볼륨
소낙비 내리고 물오른 알몸, 탱고의 음표예요
살아있음을 참지 못해 바람구두를 신어요
발꿈치에 매발톱이 돋아요
춤추는 붉은 드레스, 활짝 핀 함박꽃이에요
숨이 찬 바이올린 네 줄, 끊어질 듯, 질, 듯
아, 생의 볼륨을 높여요 포플러나무 끝까지
이윤훈 시인(평택) / 파멸을 탐하다
텃밭의 자두나무는 내게 나무 그 이상의 것
가지가 휘도록 달린 것들이 빛의 변주 속에 커 가기 시작하면 하늘 가까이 달린 것은 내게 늘 그리움 같은 것
몇몇은 서둘러 풋것을 따가고 몇몇은 손에 닿는 것을 입에 넣고
대나무 장대를 벗어난 것은 날개 달린 풍뎅이나 찌르레기들의 오찬
높은 바람을 삼키고 검붉을 대로 붉은 농익은 끝 두려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린 그 탐스러운 것
이른 아침 나는 나무 밑 이슬 젖은 풀 속을 더듬어 가슴 떨림으로 그 파멸을 탐했다
-시집 <생의 볼륨을 높여요> 문학의전당
이윤훈 시인(평택) / 청춘
가만히 서 있으면 한 쪽으로 기울어 불안하다
달릴 때서야 비로소 평형을 이뤄 바람의 날개가 솟고 심장이 뛴다
가파를수록 힘을 느끼는 위태로운 길 죽음이 표시되어있지 않은 이정표
내 안의 해와 달이 힘차게 돈다 펄펄 죽음이 살아있다
이윤훈 시인(평택) / 등부터 겨울이 온다
등부터 겨울이 온다 반쯤 열린 뒷문의 귀가 마른풀살랑이는 산그늘 쪽으로 기울고 웅덩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대의 등이 설핏 보였을 때 그곳이 그대의 속울음이 고였던 자리라는 걸 나의 벽지라는 걸 시린 등으로 알았다 그대 없어 등이 더 어둡고 시리다 뒷문 곁 강아지 등에 손을 얹는다 앞산 뒤켠으로 아직 남은 빛이 환하다 한때 비겁하게 비수를 감춘 적이 있다 내 등에 통증이 왔다 내 등이 얼마나 가파른지 지나는 바람이 일러주었다 가끔 내 등에서 벌레 먹은 가랑잎이 서적인다 이제 쓸쓸한 등으로 나를 다 보이고 싶다 어둠이 오고 저마다 제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군불을 지펴 지붕 위로 순한 연기를 피워 올려야겠다 겨우내 그대의 등에 곤히 등을 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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