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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병근 시인 / 번개를 치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30.
정병근 시인 / 번개를 치다

정병근 시인 / 번개를 치다

 

 

구름 점퍼 깊숙이 그녀의 간격을 넣고

지상의 접선 장소를 수소문했다

수많은 시간의 길을 갈아탄 끝에

백화점 정문 앞에서 푸르스름하게 깜박이고 있는

그녀의 文明을 만났다

얼마 만에 발 디뎌보는 未踏이던가

번개 여관으로 가는 잠깐 동안에도

불똥이 몇번씩 등줄기를 훑었다

이윽고 모든 저항을 벗어던진 알몸이 되자

푸른 벼락이 그녀와 나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폭우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예각의 빛이 나왔을 때,

그녀가 물을 뚝뚝 흘리며 머리를 빗었다

방전된 그녀의 눈빛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폐허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 여기저기에서 무수한 섬광이 번쩍거렸다

수많은 문명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순간들이었다

멀리 천둥 소리가 들려왔다

방문을 닫고 충전기에 배터리를 꽂았다

다시 깊은 잠에 빠질 참이었다

 

 


 

 

정병근 시인 / 불후의 장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인데

순두부 백반 먹고 나온 햇살이

비스듬히 기우는 오후

담장 너머 입 벌린 목련꽃이

침냄새 피우고 있는 봄날인데

팔각 갓 쓴 쉼터 마루에

영감 둘 걸터앉아 장기를 두신다

한 영감 대여섯개 남은 장기알 놓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을 골백번 누비신다

반쯤 벗은 양말 무좀 오른 발바닥 긁고 계신다

다된 밥에 코 빠뜨릴라 다른 한 영감

바늘 눈 뜨고 구경꾼들 흘기신다

장고에 든 장기판은 목하 움직일 낌새없고

한 떼의 여학생들 까르르 흩어지며 지나가는데

제풀에 지친 구경꾼들도 침을 탁탁 뱉으며 제 갈길 가는데

아까보다 좀 더 기운 햇살이 명자꽃 울타리에 쏟아질 즈음

가만히 보고 있던 큰 눈 하나가

불멸의 한 수를 슬쩍 두고 가신다 그때

목련꽃 한 송이 담장 밖으로 툭 떨어진다

 

 


 

 

정병근 시인 / 목포홍탁, 그 여자

 

 

험상궂게 주름 팬 얼굴

어떤 남자의 누님이며 어머니일 법한

그 여자 뚜벅뚜벅 썩은 홍어를 썬다

입가에 욕지거리를 다는 걸 보니

벌써 한잔했다 한때

벌교 순천 카도집, 도둑 같은 남자 기다리며

시퍼런 칼 쓱쓱 갈아

쇠불알 썰던 그 여자

펄펄 김 피우던 그 여자

긴급 출동 강북 카 써비스옆

목포 홍탁 불낙연포 바랜 선팅

세 평 공간까지 쫓겨온 사연, 술 권하지 마라

저 여자 우렁우렁 팔자타령 나오면

그까짓 중랑천변 이십 몇 층 아파트쯤

한걸음에 훌쩍 타넘고

인수봉 백운대 단숨에 올랐다가

죄 없는 홍어 옆구리 자꾸자꾸 베어준다

그 집, 나올 때는 꼬부라진 혀로 시비를 걸든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야 한다

시퍼런 칼을 들고 밤새 우는

목포 홍탁, 늙은 그 여자

 

 


 

 

정병근 시인 / 여뀌들

 

 

다 필요 없어

제발 버려줘 잊어줘

우리끼리 잘도 자랄 테니깐,

 

눈 밖에서 더 잘 크는 놈들

모가지에 벌겋게 독 오른 놈들

목젖 가득 차오는 폐단을 주체할 수 없어

아무나 잡고 맞짱 뜨자는 놈들

 

모래밭에 떼거리로 서서

온몸을 긁고 있었다

 

무서워서 아들놈을 재촉하며 돌아오는데

야, 그냥 가냐. 그냥 가!

아스팔트 산책로에 들어설 때까지

등 뒤에서 감자를 먹였다

 

중랑천변 모래밭, 여뀌들

 

 


 

 

정병근 시인 / 담장 안의 라일락

 

 

나는 상심이 많은 이마로

소문처럼 설핏설핏 넘보네

너는 무슨 일로 안 보이는가

 

닫힌 대문의 인중에 들끓는 적막

담을 넘어오는 향기여,

기척 없는 방안에서

너는 무슨 예쁜 일로 골몰하는가

 

부끄럽고 위태로운 짐승 하나가

내 안에는 도사리고 있어

땀이 흥건한 손으로

어느 날은

너를 저지르고 말겠네

 

너를 생각하며 돌아오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길

 

너는 내 눈에 보이지 마라

순하고 놀란 눈으로 마주치지 마라

꽃은,

네가 사는 담장 안에 피어라

 

 


 

 

정병근 시인 / 파밭

 

 

돈황의 검객들이

玉碎한 그 자리에

무수한 칼날이 올라왔다

 

칼 끝에 방울꽃을 달고

피 냄새를 숨긴 채,

 

땡볕을 견디고 있는

저 고요한 칼밭

 

 


 

 

정병근 시인 / 나무의 境地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않고 부딪히지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있는 그 한가지로

마침내 가지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 시인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88년 계간 《불교문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대시학》에 〈옻나무〉外 9편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제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