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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시하 시인 / 숲으로 가는 길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9.
이시하 시인 / 숲으로 가는 길

이시하 시인 / 숲으로 가는 길

 

 

숲이 내게로 오지 않아

내가 숲으로 갑니다

 

새 한마리 길 열어주니

두렵지 않습니다

 

때로 바람이 음흉하게 휘돌아 몰아치고

마른 까마귀 카아카악 울며 죄를 물어와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가야 할 때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람도 잔잔하여지고

까마귀 울음 소리 잦아들면

 

멀리 앞서가던 길잡이 새

나를 기다립니다

 

길은 밝아지고 푸른 것들이 환호하며 손뼉 치는 소리

시냇물 소리,들꽃들 웃음소리,나비의 날갯짓 소리

 

푸른 숨소리,소리들 무지개로 떠 흐르는

저기 먼 숲이 나를 부릅니다

 

때로 두려웁지만

숲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시하 시인 / 밥

 

 

나를 밥이라 부르며

밥으로 아는 이들이 서운해서

아주 가끔은 기일게 돌아서

느적느적 집으로 간다

밥 때가 아슬아슬 지나가게

걸음을 아껴 걷다가는,

그래도 뭘 먹기는 한 건지

행여 굶고 있는 건 아닌지

속으론 자꾸 신경이 쓰이고

되레 내가 참 나쁜 인간 같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인데,

조금 늦은 나를 와락 반길 적엔,

좀 미안하고 고맙기도 하다가

엄마 바아밥, 빨리 바압,

하며 손잡아 끌 적에는

여전히 날 밥으로 여긴다 싶어

이내 속상도 하고 서운도 하고,

그래, 그래도 밥이 최고지

다 밥심으로 사는 거잖아, 하고

국 끓이는 소리, 밥 푸는 소리 들려주면

금세 무럭무럭 살 오르는 저들이

또 너무너무 이뻐 죽겠는

 

밥 같은 저...........

 

 


 

 

이시하 시인 / 새는

 

 

 낡고 어두운 그림자를 제 발목에 묶고 생의 안쪽으로 타박타박 걸어들었을 테지 비에 젖은

 

 발목을 끌며 어린 날개를 무겁게 무겁게 퍼덕였을 테지, 가느다란 목덜미를 돌아 흐르는 제 절박한 울음소리를 자꾸자꾸 밀어냈을 테지 여물지 못한 발톱을 내려다보며 새는, 저 혼자 그만 부끄러웠을 테지, 그러다 또 울먹울먹도 했을 테지

 

 어둠이 깊었으므로 이제,

 어린 새의 이야기를 해도 좋으리

 

 나지막이 울음 잦아들던 어깨와 눈치껏 떨어내던 오래된 흉터들을 이제, 이야기해도 좋으리 잊혀가는 전설을 들려주듯,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 낯설고 차가운 이국의 신화를 들려주듯 이제, 당신에게 어린 새를 이야기해도 좋으리

 

 새는

 따스운 생의 아랫목에

 제 그림자를 누이고

 푸득푸득, 혼잣말을 했을 테지

 흥건하게 번지는 어둠을

 쓰윽, 닦아내기도 했을 테지

 

 새는.

 

 


 

 

이시하 시인 / 생일

 

 

편물 공장 다니던 언니가요

오백 원짜리 지폐를 몰래 주었는데요

그날은 내 생일이었는데요

 

아빠 검정 장화 속에 엄마가요

아침에 일 가시면서 나물 판 돈 오백 원을 넣었다는데요

하필이면 그날이 내생일인데요

나는 모르는 일이에요, 참말.

 

저녁 무렵에 엄마가 오셔서는 오백 원이 없어졌다고요

다섯 형제 세워놓고 주머니 검사를 하는데요

내가 그만 오백 원을 써버릴 걸

아까워 못 쓰고 그냥 만져만 보고보고 했었는데요

 

벌써부터 못된 짓만 배웠다구요

파리채로 종아리를 때리는데요

내꺼에요

내꺼에요

억울하고 분한데요

엉엉 우는데요

퇴근한 언니가 내 죄를 사해주었는데요

 

엄마가 그만 눈시울 벌개서는 오백 원을요,

도로 내 주머니에 잘 접어서 넣어 주었는데요

심통이 났는지 어린 것이 뭔 자존심이 있었는지 모르지만요

축축해진 오백 원을 짚불에 던져 버렸는데요,

 

이번엔 언니가 눈시울이 벌개서는

그거 벌려믄 지지배야, 하루 종일 일해도 모자라.....

 

그만 딱,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했더랬어요.

 

 


 

 

이시하 시인 / 흑백 사진 속에는

 

 

마을 회관 앞 대머리 사진사가 왔네

확성기로 소리치네

영정사진 찍어 드립니다!

늙은 할매가 지팡이로

누렁이를 후려 패며 오네

염병, 집구석에 있으란께 왜 따라오고 지랄이여,

누렁이 기어코 할매 발치 지키네

저눔이 나 따라 황천까지 갈라는가....

 

마을 회관 앞 대머리 사진사가 왔네

확성기로 소리치네

증명사진 찍어 드립니다!

상고머리 풋 소녀가 징징징

눈물 콧물 훔치며 오네

어매야, 다 해어진 뜨개 옷 입고 어찌 찍나, 나 안 찍을란다,

풋 소녀 기어코 어매 가슴 허무네

요번 장날 꼭 새 옷 사줄러니 그만 울그라...

 

오래된 흑백 사진 속에는

황천에 못 따라간 누렁이가 늙어 가네

새 옷 한 벌 못 사준 어매가 늙어 가네

 

 


 

 

이시하 시인 / 월경

 

 

까무룩 놀라고 말았습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죽을 병 걸렸다고

밥도 안 먹고 싸매고 누웠더랬습니다

 

어둔 밤 혼자서 훌쩍거리며

나는 죽어 가는데 저렇게 밥들이나 먹고,

하양 웃고 떠들어 댄다고 야속한 맘에

지레 유서라도 써놓을까 했더랬습니다

 

조카가 초경을 한답니다

이모, 챙피해 죽겠어, 엄마한텐 말하지 마

나는 옛일이 떠올라 웃겨 죽겠는데

저는 챙피해 죽겠답니다

너 죽을지도 몰라, 유서 써 놔라, 농담에

조카 년, 숨 꼴딱거리며 웃어 댑니다

공룡시대 줄 아나봐, 초경 모르는 애가 어딨어?

 

동백이 우수수 하혈을 합니다.

낯 뜨거운 뜨락에 훌훌 바람이 붑니다.

부끄럼 감추느라 부산스럽습니다

 

 


 

 

이시하 시인 / 꽃같은 거 보지 마

 

 

언덕을 오르는데 말이지 겨드랑이가 환해지는 거야.

밥사발 수북수북 고봉으로 차려놓은

조팝나무 꽃이 보이잖아.

밤새 군불 지핀 것이 봄이겠거니,

정분 난 봄, 고것이 사알살

조팝나무 손가락 발가락 간질이고 간질이고 하다가

화라락, 하얀 꽃불을 터트리고 만 거려니

고것처럼 환해지고 싶다가

환해진다고 믿어 보다가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음 싶어지는 거야.

 

오늘 그랬거든, 내가

돈 좀 빌려 줄래, 돈 좀 빌려 줄래,

심부름 가는 어린애처럼 자꾸 되내였는데

그 말이 참 안 나오는 거야

커피만 갖다주더군

원두야 이거, 향 좋지?

속 쓰리다 얘.......

비싼 애완견의 소프라노 소리

짖지 마, 간식 줄게 육포 찢는 소리

핏자헛에 시켜, 이름 없는 집 건 맛없어 소리

저녁 하기 싫은데 잘 됐네 소리

자기 퇴근하면 회전 초밥집 가자 소리

반짝이는 소리들 뒤에

돈 좀 빌려 달란 소리, 배고프단 소리 안 나오지 뭐야

봄은 봄이네 날씨 기똥차게 좋다, 그치?

반짝일 듯싶은 소리 하나에 웃음도 덤으로 떨궈 놓고,

 

언덕을 오르는데 말이지 겨드랑이가 환해지는 거야

밥사발들이 벌떡벌떡 걸음마다 쫓아오잖아

밥물 냄새 화악 풍기는 고것들이

밤새 짓까불며 간질간질 웃다 터져버린 고것들이

거짓부렁 하잖아, 밥인 양, 밥인 양........

꽃이 밥으로 보일 때는 꽃 같은 거 보지 마.

 

 


 

이시하(李翅河) 시인

1967년 경기도 연천 출생. 본명은 이향미. 제18회  월간문학 저널에 "패랭이꽃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6년 제12회 지용 신인문학상 당선. 2008년 제10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푸른 생으로의 집착』 『나쁜 시집』. 2009년 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시부문 수혜. 현재 <빈터>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