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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시인 / 이 시간에
말탄 전사처럼 눈발이 달려든다 필사필생必死必生의 각오로 내달리는 군마들 칼날에 잘린 어둠이 하얀 피를 쏟는다
지상을 덮고 있는 고요한 주검들 장렬한 죽음들이 하얗게 도열한다 노인은 빗자루 들고 새벽을 쓸어내린다
-《시조시학》 2023. 가을호
강대선 시인 / 개기월식
품는다, 발가벗고 뜨거운 유곽의 밤 땅 위에 올라타듯 눈발은 내려앉고 저마다 흥청거리는 은밀한 소리의 섬
길을 잃은 발길들 미조迷鳥처럼 붙들리고 빌딩 숲 그늘 속엔 성과 속의 그림자 체위는 식어버린 채 낙엽으로 구른다
절정이 지난 후에 맞이하는 허무의 꽃 만나자 이별하는 한 밤의 데칼코마니 우주는 별빛 한 대를 말없이 입에 문다
-《오늘의시조》 2023. 제17호
강대선 시인 / 모빌은 오지않고
찬 벽에 솔방울이 걸려 있다 눈은 오지 않고 나는 가지 않고 그 사람도 오지 않는다 마른 솔방울이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모빌을 내려 먹이를 주듯 물을 뿌려준다 흡족해진 고요 나도 입을 벌리고 울었어야 했을까 눈은 오지 않고 나는 울지 못하고 그 사람은 오지 않는다 -반연간 『상상인』 (2023년 1월호)
강대선 시인 / 구릉
아가미를 버들가지에 꿰인 메기가 탁자에 앉아 있다
딸려온 물빛이 거무스름하다
물내가 전부였을 것 같은 저 입으로
뻐끔거리는 허공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바라보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수염은 그가 한 마을의 유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릉이 실은 고분이었다는 구깃구깃한 신문기사가 메기 앞에 놓인다.
고분에는 왕이었을 어쩌면 한 고을의 유지였을 사람의 뼈와 금으로 된 장신구가 신발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수염이었을까
구릉속으로 유영은 하는 메기가 버들가지를 빠져 나온다 한때는 잘 나갔던 기억으로 살아온 주인장이 하품을 한다. 눈물이 찔끔거리는 메기가 끓는 탕 속으로 몸을 던진다. 구릉은 왠지 메기의 잘 나가던 한 때처럼 쓸쓸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발처럼 남겨진 버들가지를 허공으로 보내준다.
한 번은 어디론가 훨훨 날아보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유지遺志였다. -201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강대선 시인 / 80년 0월 바람이 불어오면 노를 저어가자 바람의 노를 저어 서러운 혼들에게 바삐 가자 이름조차 없이 사라진 혼들이 또 얼마인가 바람에 혼을 싣고 망월동으로 넘어가자 죽음을 먹고 권력을 쥔 그날의 총성은 0월의 하늘을 흔들고 있건만 죽음은 죽음으로 흘러가고 이 땅에는 다시 오월의 꽃이 피어난다 기억은 흉터로 남아 어느덧 사십 년을 뒤로한다 책임자는 입을 다물고 남겨진 파편과 증언들만 가슴에 박혀 그날을 기억한다, 저 망월동 어느 깊은 곳에서 살아남은 우리를 부르고 있다 불의가 세상을 덮으면 또다시 깃발을 들고 나아가리 한 걸음 한 걸음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며 그날에 스러져간 죽음들을 떠올리리 망월동은 말한다 끝난 것은 없다 광주의 0월은 죽음을 자리에서 새로이 부활한다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어떻게 죽고 살아야 하는지 손을 들어 정의와 진실을 부른다 0월의 십자가 위로 핏빛 혼들이 깃발로 펄럭인다
강대선 시인 / 혼불26 -최미애 님
태중에는 팔 개월 된 아이가 있었어요 제자들을 찾으러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밤은 깊어갔어요 걱정 끝에 밖으로 나가보았어요
계엄군이 쏜 총알이 무정하고 차가운 폭력의 금속이 내 머리에 박혔어요
아기는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발길질하지만 죽어가는 엄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어요
아기도 나도 이 죽음을 영영 이해할 수 없겠지만 기억해 주세요
태어나지 못한 나의 아기를 멈춰버린 발길질을 아기의 태동을
강대선 시인 / 혼불35 -노경운 님
영암에서 형을 도와 페인트 가게에서 일했지요
접착제를 사러 광주 시내로 나갔어요
광주 골목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었어요
석가탄신일이 내일인데 부처님이 노하시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가슴과 배에 총알이 박혔어요
무너지신 어머니가 나를 따라오셨어요
부처님, 울고 있을 형을 위해
환한 연등 하나 밝히겠어요.
강대선 시인 / 0월, 붉디붉은 꽃아
0월 바람의 노를 저어가자, 설온 바람의 노를 저어 말하지 못한 서러운 님들에게 가자 죽어도 이름조차 없이 사라진 이들이 또 얼마인가 바람은 설온 혼을 싣고 망월동을 넘어간다 죽음을 먹고서 권력을 잡았는가 그날의 총성이 아직도 쟁쟁하건만, 0월의 총소리에 가슴이 멍들었건만, 죽음은 죽음으로 세월을 건너가고 해마다 0월, 꽃은 또다시 피어난다 가슴을 찢어대는 울음소리 여전하고 책임자는 책임 없다, 비겁의 입 다물고 차가운 총구들은 오늘도 눈 감으니 남겨진 증언들과 핏빛 이슬로 스러져간 죽음만이 애달프다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말해도 저 망월동 어느 곳 아직도 못다 푼, 누군가의 절절한 통곡 소리 들려온다 살면서 희망조차 절망으로 다가왔을, 그날을 기억하며 망월동을 찾아 꽃 한 송이 놓는다 한 걸음 나아가고 한 걸음 물러서며, 지나가고 지나오는, 핏빛 생과 죽음들을 향해 고개 숙인다 80년 0월, 광주의 시민들이 불꽃을 품고 망월동에 누웠으니, 끝났다고 해도 끝난 것은 하나 없다 죽음의 자리에서 환한 생의 불꽃이 타오르느니 우리 가슴에 5·18은 새로이 부활하는 영원한 봄꽃이다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누구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온몸으로 말해주는 기록이자 봉화이다 새로운 희망은 해마다 뜨겁게 가슴을 적시고 망월동에 누운 우리의 부모가, 우리의 삼촌이, 우리의 누이가, 우리의 동생이,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친구가, 우리의 동지가 붉은 십자가로 꽂혀 있다
붉디붉은 아침을 맞이하며 십자가 위로 꽃들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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