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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심 시인 / 쉼표를 연주하라
연주하라 숨 가픈 하루의 가락에서 다음 가락까지 서툰 숨가락의 간격은 너무 멀고, 몰아쉰 숨의 고비가 거칠다 해도, 밝은 귀까지 닿아야 할 소리를 위해
때론 연주하지 마라 힘든 한 매듭의 음과 음을 건너느라 소리로 번지는 향기를 제쳐버리고 춤사위를 놓친 채 고저장단에만 매달리려거든
다시 연주하라 삼백예순날 도돌이표를 몰고 온, 숨의 박자에 고이는 숨결로 네 숨결의 무늬를 타라 오선지의 고저가 멈춘 바로 그 자리, 오직 박자만을 안고 있는 거기에서
조영심 시인 / 그냥 숲 한라산 끼고 한여름 땡볕을 지난다 숯쟁이나 사냥꾼들이 터놓았거나 오소리 족제비 노루들 다녔던 산 중턱을 허리띠 두르듯 이어놓은 숲길이다 너르면 너른 대로 좁으면 좁은 대로 바람의 길 비틀어 주고받고 넘치면 넘치는 대로 덜하면 덜한 대로 한 올의 햇살도 너나들이 건네고 돌멩이가 이슬에게 이슬이 풀에게 풀이 나무에게 나무가 저 바람에게 바람이 다시 나에게 서로 바라보기만 해도 함께 있어 주기만 해도 알아서 다 일구어내는 숲의 일 이대로 이 숨이 저 숨에 이르게 그냥 가만히 지켜만 본다 그냥 가만히 숲이 되어 선다
조영심 시인 /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않는다 달빛도 별빛도 발길 끊어버린 번화가 포구에 하늘길 바닷길 내어줄 그 바람, 아기 숨결 같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제1회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조영심 시인 / 그리움의 크기
그리움에는 닿지도 못할 한 뼘 엽서를 본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간절한 전언인 양 최초의 선언인 양 붙잡고 있는
방금 보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울컥 보고 싶어지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그림
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벼랑 끝에서도 한 줄 소식에 달게, 매달리는 날들
단단한 그리움 아쉬움 모두를 이 작은 종이그릇에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까
바다 건너온 바람이 옆에서 소리 높여 활자를 읽어주자 다섯 줄 골똘한 단문 한 뼘씩 목마른 곡절로 행간을 넓혀가며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중인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 내 속까지 파고드는 둥그런 파동 자꾸 터져만 간다
조영심 시인 / 별빛 실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가막만은 별빛 자르르한 옥토였다
먼바다 돌아온 달이 외진 포구 넘너리에 고삐 매어두는 밤, 개밥바라기별 앞세워 대경도 소경도 물결 찰방이는 소리에 우수수 우수수수 쏟아지던 별의 금싸라기, 뭍에서나 물에서나 별의 숨결 받아먹고 숨탄것들 탱글탱글 여물던 찰진 별 밭이었다
큰바람도 여기 와선 숨을 고르고 별들과 뒹굴었다
언제부턴가, 경도 큰 고래 작은 고래 등허리에 줄지어 내걸린 큰 전등이며 나뭇가지 친친 감은 색색의 꼬마전구에 밀려 그 많던 별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잔잔한 바다에 고랑 이랑을 내고 별빛을 경작하던 바람도 이제 길을 잃었다
전설이 죽고 꿈도 사라졌다
밤낮없이 먹고 마시고 노느라 팽개쳐버린 별빛은 이제 더 이상 바다에 이르는 길을 내지 않는다 달빛도 별빛도 발길 끊어버린 번화가 포구에 하늘길 바닷길 내어줄 그 바람, 아기 숨결 같은 그 잔바람은 어떻게 오실까 계간 『시산맥』 2022 겨울호
조영심 시인 / 돌무덤
말로할수없는말들이있다 말의지극함이날아갈까봐 고비를넘어야할딱,그고개쯤 끌고온벅찬숨을고르는그자리쯤에 누군가
숨을눌러덮어야할한소절을 천둥·번개로끊어진침묵의돌로눌러놓는것이다 초원이내려다보이는모골이송연한산허리 어둠이제풀에지쳐누워버리고 모래알갱이처럼빛이일어나는시간 쌓아놓은낮은말들 솔로먼지를털듯 산중턱을넘어온바람채로거르고 하룻밤이면하늘로이어지는별천지를오가며 묻어둔말들이바람숭숭돌의뼈가될때까지
여린햇살로익혀진돌무지에 간절함이새겨지느라푸르게흘러가는 소리들 돌의탑을돌고돌아다시말의빛이되는 말로는다할수없는
살아온,살아있는,살아있을, 내말들의무덤
조영심 시인 / 어느 요절시인께 드리는 편지
산문에 기대어 묻습니다 좋은 시 한편 쓰고 가라더니요 병아리 이빨 닦는 소리도 들으라기에 십여 년 들은 풍월로 담을 헐고 소리의 정원에서 막 정원사 노릇 하려던 참이었는데요 남도의 밤 식탁 머리 밭 시간의 마모를 견딜 달궁아리랑과 빨치산 고향 땅 사구시의 노래쯤에서 여기서 시가 안 나오면 어디서 나오냐셨지요 우리들의 땅 언 땅에 조선 매화 한 그루 심고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며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처럼 오실랑가요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로 오실랑가요 별밤지기 되어 하늘 돌 파천무로 오실랑가요 꿈꾸는 섬을 굽어보는 어초장 뜰 그 때 묻힌 쭁이 컹컹 짖어대는 봄날엔 낚시하고 군불 지피러 휭 하니 다녀가실랑가요 허공에 거적을 펴고 새야 새야 파랑새야 불러 쌓더니 멀디 먼 흑룡만 리로 뜨시다니요 백세를 사는 이 질긴 시대에 요절이라면 퉁 하실 건가요 어제 밤 꿈길처럼 숨이 돌아오시면 아도에 다순 밥 한 그릇 준비하지요 질그릇처럼 웃어주실 거지요 다시 산문에 기대어 묻습니다 머덜라고 시 쓰냐고
*송수권 시인, 2016년 4월4일 별세, 그의 18권의 시집 제목을 차용함. **조영심 시집『담을 헐다, 소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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