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한석호 시인 /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9.
한석호 시인 /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한석호 시인 / 첼로가 있는 밤의 시제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마야 여인들은 회로 칠한 강물에 몸을 던지고

사라진 것들의 안부를 찾기 위해

악사의 활은 바지랑대 위에서 목을 다듬는다

 

한쪽 귀를 자른 사내가

자신이 그린 밀밭의 밤을 강파르게 채색하고 있다

고독한 이름들은 자주 어두워진다

신을 찾는 무리들이 종종 빛을 끊어 버리듯이

 

답답하고 먹먹한 하늘과 땅

갈 곳이란 도무지 보이지 않는 시제를 만나면

무작정 춤을 추어야 하는 걸까

천문을 열자 푸른 물길이 밤하늘을 연주하고 있다

 

겉으로만 웃으며 살아가는 사내들

하나같이 제 갈비뼈를 휘어 활을 만든다

살아남은 자의 정오를 지나서 찾아올

그 누군가를 오래오래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시집 <먼 바다로 흘러간 눈>, 문학수첩

 

 


 

 

한석호 시인 / 박제된 노래

 

 

스위치를 켜면 나무들이 푸른 불길을 피우고 있다.

노인들은 뉘엿뉘엿 저물고,

아이들은 개 짖는 소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근다.

거꾸로 다가가는 저 박쥐들의 오래된 사랑 공식,

잠에서 잠으로 이동하는 환상통(幻想痛)들이

해바라기를 하던 강가의 기억들을 끌고 간다.

전등불 아래서 풀무치가 제 울음을 꺼내 손질하고 있다.

둥근 종소리가 앉았다 간식탁 위에

달그림자가 앉는다.

햇볕 속에서 달을 그리던 한 사람이 있었다.

고요를 만지는 나뭇가지 끝의 바람처럼

내 깊은 곳을 읽고 간 사랑의 머리칼이 풀무치의

푸른 울음 안에서 살고 있다.

맑은 크리스털 방울소리,

아득하게 날아오르는 파랑새의 휘파람처럼

노오란 태양을 꿈꾸어 볼까?

내 우울 위로 무게를 못 이겨 틀어진 침대를 올려 볼까?

둥근 다리를 꼬고 있는 탁자,

아침을 열고 있는 거울의 손바닥 안에

한 권의 책이 들려 있고, 찻잔에는

박제된 노랫가락들이 해바라기처럼 노랗게 꽂혀 있다.다

스위치를 끄면 개 짖는 소리가

칠이 벗겨진 내 마음의 마룻바닥을 끌고 가고 있다.

 

 


 

 

한석호 시인 / 꿀벌을 위한 칸타빌레

 

 

 꿀벌 수천 만 마리가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마귀 한마리가 당랑권을 구사하며 몸을 풀고 있다

 

 이봐요 당신, 영혼의 별들이 지기 전에 내 아랫배를 어루만져줘요 부끄러워 말고, 전자기타를 생각하면 돼요 천천히 성감대를 조절하듯 고요하게, 어루만져줘요 텅 빈 나의 심장 밖을 휘젓는 당신, 그 수법이면 어디서건 통할 거예요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었으므로, 우리 잠시 잠의 나귀를 타고 벗어나요 슬픈 거야 흔한 노래로써 지울 수 있잖아요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므로,

 

 이제 나는 전자파에 처형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기타, 나의 현을 어루만져줘요 아카시아 꽃이 언제 피고 밤느정이는 어디서 농염한 수액을 뿜는지, 비에 젖은 산길과 통나무집과 희부옇게 언덕을 넘는 싸리꽃들

 

 욱신대는 상처위로 산안개가 얼비치다 가요. 무슨 색이었죠? 해오라기 떼 날고 있는 그림 한 점이 낡은 하늘에 걸려 있군요. 둥글게 등을 휜 채, 시간의 등 위로 아랫배를 튀겨 올려보지만 이젠 더 기력이 없군요

 

 일용할 양식은커녕 날개를 펼 힘조차 모두 잃고 말았어요 내가 그대에게 그대가 나에게 존재가 아닌 존재가 되었을 때, 그때는 모든 전자파들이 우리를 튀겨버린 뒤일 거예요 한 백년은 놓아두어야 드러날 내 마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었으므로,

 

 방울소리가 내 생의 겨울을 딸랑대고 있네요 이 밤의 별들과, 이슬은 젖은 영혼들과 풀벌레들의 양식이죠 그대와 나의 기억을 누군가가 전지(剪枝)하고 있는 이 시간, 어서 드세요 식기 전에, 칸타빌레

 

-시집 『이슬의 지문』 에서

 

 


 

 

한석호 시인 / 저문다는 것은

 

 

말없이 젖는 것

행과 행 사이가

혼곤해지고

지평선을 끌고 온 물소리가

또렷해지는 일

 

 


 

 

한석호 시인 / 불안으로부터의 이소離巢

 

 

잠자는 침묵을 깨워 내 보낸 모델의 흐린 창을 열고

어둠이 살며시 내 곁에 들어와 눕는다.

종일 선창을 흔들던 바람소리와

그 바람 거슬려 나아가던 파도는

지금쯤 어느 바다로 가고 있을까 나의 시야에

수런대던 근심 하나가 솜털을 날리며

팽팽한 방안의 정적을 가라앉힌다.

이럴 땐 잠이 모두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가 주었으면 하는

가느다란 희망을 깊게 품어보는데

흐릿한 집어등 하나가

내 골다공증의 삶 위에 걸터앉는다.

내 가슴을 끌어 당겨 덮는 바람을

뼈 속에 집어넣는다.

여기 서울장 408호,

시린 무릎을 추억하고자 찾는 사람들 묵는 곳에는

또 하나의 등불 걸어두게 되는 셈이다.

그 등불 밝아 바닷길 화안하게 열리는 곳에

그 바다의 가장 푸른 물빛을 내려놓고

주름진 내면을 가만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사되는 불면의 시간 위에

나는 보내야 할 것과 지워야 할 것들의 목록을 부표처럼 띄워놓고

심지에 불을 붙인다 부채질한다.

잠은 침묵의 바다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바다는 잠의 하늘에서 차갑게 반짝이고 있다.

나는 문을 열고 훌쩍 키가 자란 등불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눅눅한 비망록을 길 위에 펼쳐놓고

뼈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온 몸 내어 맡긴다.

그런 불안으로부터의 이소를 나는 꿈꾼다.

 

 


 

 

한석호 시인 / 진경산수화

 

 

장에 간 어머이가 보고 싶어

아부지 몰래 친구를 꼬드겨 나섰던 십 리 길.

오 리쯤에서 만난 엄천강 다리에서

친구는 네발로 뒷걸음질 쳐 달아나고

용감한 척 혼자 건너다

물고기 밥이 될 뻔했던 네 살 적 여름.

햇살에 위로받다 깬 곳은

장터 한가운데 작은아부지 지게 위.

처음 먹어본 찐빵과

처음 본 짐차를 타 보기까지 한

경이(驚異)로운 한나절,

그날 밤 목침으로 떨어지던 회초리와

물귀신의 장난은

지금도 가끔 나를 쫓아다니곤 한다.

눈을 뜨고 다시 읽으면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흐릿한 하늘.

그날을 이제 환하게 채색하고 싶다.

내 뒷덜미 잡고 건져 올린 작은아부지도

파랗게 질려 있던 어머이도 안 계셔 찾아갈 수 없지만

그 찐빵집에 두 분 모시고 가

따끈한 찐빵 듬뿍 대접해 드리고 싶다.

환하게 웃으시는 두 분께

넙죽 엎드려서 큰절 한없이 올리고 싶다.

 

-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4년 2월호

 

 


 

 

한석호 시인 / 어둠의 겉봉에는 수취인이 없다

 

 

시간은

땅거미에 이끌려 한 발짝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가설수록 무거워지는 나의 걸음 앞에서

마을과 길들은

공손하게 허리를 꺾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황홀과 빛남이

저처럼 낮게 엎드려온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나는, 내 안에 품었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으리라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보낸 나의 마음들은

밤하늘 광활한 백지에 활자가 되어 빛나고

억새의 늦은 울음을 한 아름씩

산등성이에 뿌리고 있었다.

立冬 지나면

나의 그리움도 고뇌에 찬 나의 시편들도

억새풀처럼 날려 가겠지만

살얼음처럼 투명하게 번져가는 밤하늘은

또 누가 쓰고 누가 반송한 소식들로 쌓이는지

나는 그 어둠의 겉봉을 접고 있었다

 

 


 

 

한석호 시인 / 풍적(風笛)

 

 

내 영혼의 유배지

타클라마칸에는 모래와 바람이 만든 왕국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길을 잃은 목동이었고

그대는 천년을 넘어 아스라한 기억을 찾는 여행자였다.

광막한 하늘보다 더 맑고 깊은

길을 내는 그대에게 견인되어 나는 무작정 걸었다.

모래알들은 발자국을 쓸어 그 흔적을 지웠지만

흔적은 다시 흔적을 만들어 길 위에 세웠다.

누가 손을 끌지 않아도

누가 등을 떠밀지 않아도

회오리 바람 속으로 들어가몸을 마는 시간처럼

나는천천히 내 심장을 연주했다.

진동 밖에선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고

지상의 모든 소리들은광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라진황금의 시간을추억하는누란樓欄,

문득 반사되던 발자국이 멈추고

거기 증발해버린나의 오아시스에 불던 바람이 살고 있었다.

막 도착한 기차역에서 두리번거릴 때

인파를 뚫고 나와 덥석 손을 잡고흔드는 누군가처럼

그곳에서 나는 나의 푸른 초원을 보았다.

실크로드의 서역남도, 빛나는

꿈이 발현되고 소멸되어 가는 그 풍경 속에 나는

내 낡은 大笒의 입술을 내려놓았다.

한차례 습윤한 바람이 지나가고

그대의 길고긴 그림자 끝에서 물기가 반짝였다.

‘영혼들아, 가다듬고노래 부르라,

물이 오래된 잠의 노래를 흐느끼고 있었다.

그대라는 젖은 이름의 목동이 되어

오래오래그 초원 가꾸며 늙어가겠다고.

내 영혼의 안식처 타클라마칸에는

그대라는 아득히 지워지지 않는 유배지 하나 있다.

 

-시집 『이슬의 지문』에서

 

 


 

 

한석호 시인 / 허기진 날의 저녁 2

 

 

상처 입은 새는 집을 짓지 않는다.

스스로의 몸을 집으로 삼는다.

그가 날아온 길들, 살아온 길들만이 나뭇가지처럼 꺾여 있다.

 

그대들,

내 마음의 모닥불을 보아라.

 

내 마음이 눈발을 끌고 오는 저녁이다.

내가 기거하고 있는 헐벗은 산들이 제 옆구리에 손을 넣어

밀려드는 어둠의 턱뼈를 만져본다.

이 저녁에 닻을 내리는 것은 나 같은 날짐승의 호기심만이 아니다.

방황하는 자의 모닥불도 잠시 여정을 내려놓고

아이들의 잠속에 뜬 저녁별을 헤아린다.

저만치 가물거리는 불빛 몇,

종일 물을 길어 올리던 여자들의 하루가

소금에 절어버린 걸음들 데리고

아궁이 쪽으로 걸어간다.

아, 저 아궁이가 내가 태어난 곳이리라.

 

스스로 몸을 뒤집는 눈발들,

흰 눈송이의 걸음을 흉내 내며

소금기둥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눈의 고요함,

 

내 두 팔의 고요를 벌려

저 소리 댐으로 가두면

삶은 다시 고요로 뒤덮일까.

     

나는 잠들지 못하는 마음을 쪼개

홀로

모닥불 지핀다.

 

-시집 <이슬의 지문>에서

 

 


 

한석호 시인

1958년 경남 산청 출생. 경희 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7년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 시집 『이슬의 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