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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 시인 / 땅속을 나는 새
콘크리트 철근 사이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삽질을 하던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비벼 끄던 사내의 신발이 멈추고 새는 곧장 공사장 바닥에 떨어진다 날개를 접은 새위 몸에서 피가 흐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든다 자기가 새인 줄 알았나보지, 호루라기를 불면 뛰어온 작업 반장에 손을 떤다 석회가루를 뿌려도 깃털처럼 쏟아진 빗방울운 지워지지 않는다 레미콘 차가 다시 달리고 벽돌이 하늘로 올라가고 철근이 건물을 동여맨다 새는 하늘에서 땅속으로 날아간다 땅속에서 날개를 젓는 새 한 마리 때문에 종일 공사장에 진동이 멈추지 않는다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에서
김성규 시인 / 극락조(極樂鳥)
오랜 망설임 끝에 죽음이 완성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의 무덤에서 울어야 한다 무덤에서 새어 나온 울음을 듣고 한 마리 새는 자기 고향을 떠올린다 떠나올 때 한 줌 바람을 뼈 속에 심어 모든 새들의 뼈 속에는 태어난 곳의 바람이 산다 그 바람의 힘으로 새들은 날아오르고 인간은 날개를 위해 인간의 날개를 위해 모든 새들의 뒤를 쫓는 것이다 새들의 무덤이 되기 위해 구름은 하늘에 떠 있으므로 날개를 갖지 못한 인간은 지상의 자기 무덤에 누워 울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사육하며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갈 수 없는 고향과, 자기 이름과, 수없이 이름 없는 것들을 외치며 가장 화려한 목소리로 자기 안의 무덤에서 울어야 한다 -계간 『시작』 2014년봄호 발표
김성규 시인 / 오후가 되어도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오후가 되어도 나는 일어나지 못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인다 눈을 감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은 날 어둠이 다가와 나를 흔들 때까지 씻지 않은 밥그릇과 썩어가는 음식물이 잔뜩 쌓인 냄새나는 방에 전화벨이 울린다 귀신처럼 나를 부르는 사람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만, 흐느낄 수 있는 기쁨을 주신 밤이여 가라앉는 유리창이여 나를 바라보라 오후가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 나를, 오오 누가 나에게 밤을 선물하셨나 썩은 내 꾸역꾸역 피어오르는 방에서 어둠에 질질 끌려다니는 영혼으로 하여금 공책에 이런 시나 쓸 수 있도록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김성규 시인 / 심문관
눈 쌓인 나뭇가지를 만지며 심문관은 하늘을 본다 몇 해 전 망명자가 잡고 있던 미루나무 가지에 다시 새 잎이 돋는다
심문관도 정원사도 봄눈이 녹으면 일을 그만둘 것이다 그도 최선을 다해 심문을 했고 정원사도 겨우내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느라 허파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봄눈이 녹기 전에 심문관은 또 몇 명의 망명자를 심문할 것이다 정원에는 얇은 비명처럼 꽃잎이 날릴 것이다
바람이 나뭇잎과 뒤엉키며 흘러가는 소리, 공기의 결을 따라 발자국 위로 쏟아지는 햇살, 바람과 햇볕과 소리의 완벽한 결합을 보며 심문관은 탄복한다
눈송이가 녹아 흐르는 시간만큼 심문관은 의무를 다할 것이며, 이 세상에 심판없는 시간만큼 나무들은 자라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규칙 없는 봄이 끝나면 정원사는 가위를 들고 하늘로 솟구칠 것이다
스스로를 형틀에 매달고 살아가려는 망명자들 그들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햇볕 속에서 신음하던 나뭇가지가 땅바닥에 떨어진다 오늘 또 한명의 망명자가 체포되었다
김성규 시인 / 그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슴은 천천히 말라갔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창살 속에서, 누구도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네
농장에서 태어난 아이의 목과 등에 나타난 얼룩무늬, 사내는 아이를 사슴이라 불렀네 그러자 이마에 거짓말처럼 뿔이 자라기 시작했네
새싹만한 발가락은 자주 부는 바람 쪽으로 꼼지락거렸으나 수술은……의사가 발작을……아이가……안된다고
살이 찌며 점점 검어지는 아이의 눈동자 나뭇가지와 함께 혓바닥처럼 오그라드는 잎사귀들
몇 년째 이어지는 가뭄 속에서 사람들은 무서워지기 시작했네
거대한 나뭇가지처럼 벌어져 하늘을 떠받는 뿔을 보며 사람들이 농장 안으로 돌을 던졌네
뼈만 남은 여자가 사슴피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창유리 깨지는 소리에 놀란 여자 칡잎을 씹는 아이의 목을 껴안고 울부짖었네 울타리 둘레에 서 있는 사람들 말뚝처럼 말이 없었네 취한 사내가 망치로 사슴의 뿔을 내리쳤네
머리에서 눈썹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 뒤짚어놓은 뿔처럼 얼굴을 덮었네 창살 밖 땅바닥에 검은 뿔을 그리듯 마른 땅에 핏방울들만한 싹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네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김성규 시인 / 탈취 냄새가 그를 둘러싸고 냄새의 방에서 그는 떠다닌다 땅속은 언제나 환하게 익은 죽음의 씨방 주둥이를 오물거릴 때마다 피어나는 냄새 까만 눈동자를 굴리는 새끼들은 굶주림에 미쳐 있다 찍찍거리며 각목을 쏠아대는 소리 콩알만한 심장이 뛰는 소리 밤마다 잠들 수 없는 속눈썹을 덜며 하수구에서 하수구를 쏘다닌다 운이 좋아 트럭에 실려 떠난 형제들은 들판에서 어느 항구에서 냄새의 씨앗을 퍼뜨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아무 소식 없으니 상처를 도려낸 과일처럼 기억은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눈에 불을 켠 새끼들은 뛰쳐나가 한번 보면 눈이 멀어버린다는 햇빛 아래 붉고 싱싱한 내장을 널어놓는다 먹음직스런 자신의 냄새를 피워올린다 밤마다 그 냄새를 씻으려 창을 열면 하수구에서 쏟아지는 시큼하고 매운 냄새들 방 안으로 밀려든다 냄새에 떠밀려 천장으로, 내 몸이 둥실 떠올라! 죽음ㅈ이란 그렇게 흘러오는 것이다 흙탕물에 과일이 뒤엉키듯 저 아래 잠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상한 꽃송이 같은 새끼들을 버려두고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에서
김성규 시인 / 흰 무덤 병균처럼 흰 눈이 내리고 노인들은 마루에 앉아 바라본다 마당에 내리는 눈을 밟고 강아지가 뛰어다닌다 발자국이 남고 그 위로 다시 눈이 쌓인다 어린아이가 마당을 뛰어다닌다 죽은 남편도 나뭇짐을 지고 걸어와 담벼락 옆에 내려놓는다 마당 한쪽 양은솥이 끓고 있다 솥에서 흰 김이 무덤처럼 피어오르고 금방 사라진다 젊은 아낙은 나무주걱으로. 솥을 휘휘 젓는다 수많은 이름이 솥에서 끓어올라 김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웃음소리가 들린다 여기가 어디일까 노인들은 마루에 앉아 마당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와 어린아이와 죽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한다 어린아이는 장갑을 끼고 죽은 남편은 양은솥에서 퍼 올린 국을 마시고 젊은 아낙은 아이를 데리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무더기무더기 하늘로 올라가던 김이 다시 지붕으로 쏟아진다 마을은 희고 거대한 공동묘지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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