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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희 시인 / 비워진 집
비워진 집에 가을이 왔다 감나무 아래 널브러진 홍시 깜장개 지푸라기를 뒤집어쓰고 쳐다본다 정지간 옆 장독대 빈 항아리 엎어 놓은 뚜껑 위로 길고양이 숨죽이고 지나간다 뒤안 댓잎 흔드는 바람 깨어진 독을 심은 작은 우물은 나뭇잎으로 덮혔다 퍼내지 않는 우물은 더 시상 샘솟지 않는다
이 집 주인은 자그마한 여자였다 홍시가 떨어지면 두 개 되기를 기다렸다 스텐 밥공기에 홍시를 담고 우물 아래 쪼그려 앉아 끼니를 대신했다 앞날 계획보다 과거 기억만 반복하던 지난여름 집을 비웠다
홀로 외로운 노년 다시 가족을 꿈꾸지만 마늘밭 옆집 카페 뒷집도 비울 준비를 한다 가끔 비워야 하는 집을 만든 자식들은 눈물 흘리고 죄책감에 빠지지만 홍시가 끼니였고 가족이 돌아오는 노모의 꿈을 생각하기는 싫었다
이숙희 시인 / 달빛
육십이년 동안 계속 살고 있는 아버지 육십년째 살아 있는 어머니 삼십삼년을 살아가고 있는 아들 트럭 안에서 깨를 볶는다 발로 박자를 맞추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아들 눈부신 듯 돌아보는 어머니 후라이팬 밖으로 달아날까 불 조절 하는 아버지 만져 보면 고소한 냄새가 터지고 터질 것 같은 트럭 짐칸을 달이 비추고 있다 해가 집으로 돌아가도 지구는 어두워지지 않는다 가로등이 켜지고 아파트 층층이 빛이 새어 나오고 도로를 달리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앞길을 안내한다 언제부터인가 의지하던 달이 쉼을 보장하지 않는다 살아있고 살아가는 깨 볶는 일 해 뜰 때 까지 이어진다 달이 감성을 터치하는 순간 이후로도 계속 살아가는 아버지를 잠자지 못하게 한다
이숙희 시인 / 작업실에서
풍경소리가 들리는 작업실 입구에 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창 앞으로 백일홍 나무가 낙엽을 달고 흙 만지기 싸늘한 11월도 전을 다듬다 만 항아리처럼 채워야 할 마지막이 있어 일 욕심이 생긴다 짧은 손가락에 반지도 끼울 수 없을 만큼 거친 인생의 흔적이 작업실 안에서 혼자일 때 그 고요로움이 달다 커피 잔을 들고 백일홍 창을 바라보다 구둣솔이 되어 있는 끔찍한 창문 목숨에 대한 본능으로 떼로 붙어 있는 파리 11월 오후에 생명을 향해 뜨거운 커피를 쏟는다
이숙희 시인 / 생활 연인
화절령을 걷는다 당신의 이웃집 여자 시절 속 타는 마음도 실어가던 운탄고도 맡겨진 아이를 업고 도시락을 건네고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둘은 서로 필요한 사이였다 남자는 검은 옷을 벗고 여자는 검은 옷 빨래가 즐거웠다 아이는 학교를 가고 여자는 남자에게 돈 이야기도 하고 술집 단속도 하고 삼겹살도 구워 먹였다 막장 안은 미래를 이야기 하지 않는다 하루를 쌓아갈 뿐이다 무너진 갱도 생사 확신은 눈앞에 있어야 한다 도롱이 연못은 생명이 생존한다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본다 수많은 현실 기도가 발자국에 찍힌다 당신과 함께 막장 인생을 건너 현실 연인 화절령을 걷는다 신에게 드리는 추상적인 기도 생활은 걸음처럼 지속되기를
이숙희 시인 / 뱁새 세상에 깃들여 있다
버스를 향해 달려간다 머뭇거림 없이 떠나는 버스 소녀의 눈에 원망이 가득하다 입가 침을 머금고 흥분하는 새 여러 마리 탱자나무 덤불에 깃들여 머리를 한 방향으로 생각을 주고받는다 관심은 소문으로 퍼져 여론이 된다 짧고 통통한 몸동 가시 사이를 소리 내며 빠져 나간다 주위환경은 회색 씨앗 뿌려진 보리밭 비둘기 날아와 아침 식사 중 뱁새 소란스레, 찔레 덩굴로 날아든다 사라진 보리 씨앗 접어서 한줌 몸으로 토론을 벌인다 빼앗긴 들판에 그물 사이로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듣겠다 뱁새 입은 부지런하다 찢어지는 가랑이 보다 머리 맞대고 세상을 참견하는 말맛을 안다
이숙희 시인 / 소리
목에서 소리를 밖으로 내 뱉는다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를 때 오월의 창자가 마디마디 잘려져 허공에 떠돈다 밖으로 던져진 소리는 광주 하늘에서 땅으로만 뚝뚝 떨어져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미궁 속으로 빠진다 붉은 넝쿨장미 담요처럼 감고 머리채 끌려서 길 위에 던져진 날아가지 못하는 붉은 5.18
이숙희 시인 / 감자밭 검은 트랙의 청개구리
가끔 따뜻해보고 싶다 앞발 뒷발 강력한 흡반 청개구리 방충망에 들러붙어 사람들 웃음 구경한다 축축한 내집 따뜻하면 옮겨가는 떠돌이 삼 년을 살고 오늘은 생일 감자밭 감자잎 이불 삼아 하룻밤 자고 일어난다 물냄새 벌써 빛은 송곳같이 자라 뛰어가는 앞발도 찌른다 청개구리 생각한다 사람에게 독이 있다 편하게 살고 싶은 독 배부르고 싶은 독 웃고 싶은 독 사람이 바른 밭고랑 검은 트랙 전생을 걸고 띈다 축축하고 따뜻한 변종 트랙은 타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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