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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진 시인(안동) / 화이트홀 하우스
계단에서 밟을 뻔했다
질린 얼굴이 원래 흰 건지 분간이 어려워 잠시 어지러운 사람들인가 싶었지
한 마리의 초파리만도 못한 생이 늘어졌을 요동치는 집엔 가재도구 빈 술병 어지러울 거고 음모라고 부를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이 굴러다닐 거고
대상자를 설득하다가 어깨가 빠진 아동복지센터 직원이 떠올랐다
문을 두드렸다 지금 읽는 책은 무엇인가요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규칙은 잘 준수했는지 책가방의 무게 따윈 아랑곳없이 머리에 뾰족한 더듬이를 다듬어 놓고
시푸르죽죽하게 잠자는 아이 유통과정을 따져도 쓴맛인지 관심 없을 한 가지 표정만
-시집 『파란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박용진 시인(안동) / 문간에서
별과 별 사이 미아가 될 것 같아 달로 가려고 요금이 싼 종이배를 탔습니다 좌현으로 기운 배에 붉은 달이 떠오르고 스모그로 깃발은 얼룩지고 이주자가 늘어 흙탕물의 스프롤로 잠들 곳 사라져 심장은 달의 뒷면에서 뛰었지만 올무에 걸린 발은 늘 아팠어요 체액엔 성엣장이 흐르고 의심은 이심, 머리만 주억거려 경계를 오가는 정령*의 안내로 고요의 바다를 찾았습니다
승객들의 역진화는 진행형이지만
*이령 시인
박용진 시인(안동) / 베텔기우스가 폭발하더라도
힘을 주며 걷는 게 우선이었지
오리온성좌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별의 잔해를 찾으면서 여길 빨리 지나치고 싶어
터질 별에 대해 떠든 건 맞지만 하루 종일이 멈춘 골목에서 빛을 갉아 먹고 주저앉히는 어둠은 어느 만큼일까
질퍽한 습기가 밑창에 스며 종일 부은 발은 식지 않고
눈물에도 속물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열두 살 이하 삼분의 이는 후천 면역 결핍이랬지 그중 60퍼센트의 면역을 기대하지만
카마티푸라*의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를 낳고 깔깔거리겠지
어떤 값을 대입하며 다른 결과의 드레이크 방정식이 된 나는 골목의 무엇인가 > 끓는점이 낮은 표정이 떨어진다 부서진 별로 밝아질 하늘 한번 흘깃거린다
*카마티푸라: 인도 사창가.
박용진 시인(안동) / 소나가찌
조각구름이 말을 건다 무슨 내용인지 몰라 구름을 헤집으니 떨어지는 아이의 침상
시린 밤은 침상으로 넘어갈 것 같아 아이의 손을 잡으니 진저리치며 불렀을 구름 깃털이 흩어진다
조막손 치맛자락 칭얼대던 잠투정을 다독이려 해도 일방통행 역주행을 시켜 아픔은 잔여 메아리로 남아돌고
이건 먼지, 먼지였어
스스로 불을 지펴도 먼 세상엔 눈먼 구름 눈이 많아도 눈은 오지 않아 공공연한 일을 볼 수 없어 사로잡힌지 오랜 포르노만 얼어붙은 저녁해 아래 자리잡지
아무도 모르는 사실과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선생님들께 얘기해도 그냥 넘어가려 해 이물질 취급을 받은 나는 깨금발로 뛸까
국경에 구름을 두고 가는 구름을 보며 돌부리를 갉는다
박용진 시인(안동) / 캄보디아의 갯벌
갯벌을 거니는데 뼈 한 조각이 말을 한다 전장을 건너온 뼈는 살 속에 살던 때가 그립다며, 참호 옆 개망초 한 송이가 손에 닿는다 손에서 시신경, 지금이라도 불리는 곳까지 육식주의자들의 메탄가스와 파도가 내지르는염. 염. 아이들 낙서 낭만 엽서 살육의 풍경을 덮으려고 죄를 고백하는 이를 두고 배후 찾기는 날 샌지 오래 365일 추모하는 우리 다음으로 밀릴 뿐 언제나 포격 재개로 불기둥과 매캐한 화약, 살을 발라내는 소리 허공에서 대지로 꿰뚫려 죽은 자와 숨 가쁜 패전 소식에 분개하며 멀어지는 미완성의 스케치 기억은 언청이 소리로 귓등을 헐치고 유언을 남길 사이없이 뼈만 남아 수위를 넘어 사라짐에 몸부림치며 떠올리는 태곳적부터 살아온 방식 벽 앞 시신을 수습한다 무너지는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모래알에 스민 기억들에 성가를 부를까 물이 밀려온다 다시 돌아오는 아침의 그늘처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덮인 지 오래 통제에서 자유로울 방송을 준비하지만 입은 여전히 무언증 혹은, 속말의 행로는 측면에 머물고 후일, 기울기가 다른 애먼 해석이 될 뼈는 잠 깬 뒤의 꿈처럼 어디에도 없단 소릴 듣겠지 표백에 대한 질문은 미룬다 비린 갯 냄새 아래 부식하는 뼈를 추린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 베르톨트 브레히트
박용진 시인(안동) / 파란 꽃
너를 불러도 묵묵부담이었지 쳐다보며 부끄러워지고 파잔* 뒤의 코끼리처럼 무기력해지고 입을 여러 번 휑궈도 부서진 영혼에 대해 할 말은 뱉기 어려워 꽃을 핀다면 믿습니다만 피는 파란색인가요 빈 젖 사이 뒤척이는 아이 모두의 장례식장을 시작할 때 입니다 *파잔 phajaan - 코끼리를 길들이는 매질
박용진 시인(안동) / 눈 사람, 네 한순간 얼어붙는다 공중에 뜬 질문이었네, 라고 생각했을 때 머리는 더 커졌어 속으로 뭐랄지 대충 감은 잡히지만 아무도 관심 없는 일이란 건 네 머릿속인데 부족한 강설에도 질린 얼굴과 추위로 성장했지만 저기, 누구 없나요 물은 떠밀려 다니기 바쁜거죠 한 귀퉁이가 잘린 빈 교실 낡은 칠판의 반경의 깜밖이는 까만 눈동자들이 긴 팔을 늘어뜨린 교단엔 무표정한 어슬렁의 네가 밥을 먹는 게 전부인 시절 아이들의 행동은 처음부터 어두웠다고 하자 길게 쓴 시 읽으며 매돌된 쓸쓸함의 뒷장을 정리한다 희미한 반음의 박동으로 내일이면 커질 온도차를 떠올리며 잠들고 누가 햇살을 바랐나, 간간이 내릴 비를 걱정했지 진한 물비린내에도 녹아들길 바라겠지만 질문은 여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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