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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덕 시인 / 울산바위
미시령을 막 넘는데 구름에 가렸던 그가 앞을 막고선다. 제 몸 속에 누구 들어앉힐 구멍하나 내보이지 않으며 제존재를 드러낸다. 그모습 보이지 않을때까지 손 흔들어주고 돌아섰는데 한 구비 돌아가니 어느새 곁에 바짝 다가와 있다. 네가 먼저 나를 떠났다는듯 침묵으로 몸 낮추지만 함께가지 못할 길은 없다며 다시 따라오고 다시 떠나고 내 안에서만 흔들릴뿐 어느덧 그는 따라오지 않는데 난 아직 너무 무겁다. 너를 거기 두고오지 못해서다. 오, 미련한 내사랑
이명덕 시인 / 달빛정원
첫 꽃 핀 듯붉은 고추가 익어가며 포도랑 감이랑 모과가 춤추고 노래하네요
감물 들인 모자를 쓰고 포도 물 먹인 가을 옷 한 벌 차려입고 달빛정원으로 오셔요
어스름한 밤 달빛이 눈을 비추면 그대 눈이 별빛 향기로 물들어요
대화 없이도 마음을 읽어주듯 사뿐히 움직이며 거니는 눈빛은 신비로운 창 같아요
고품격 으아리 꽃으로 그대 필 때면 청초한 으아리로 따라 핍니다
봄여름 가을 겨울 한 리듬에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정원 언제나 내 마음속에 살아요
이명덕 시인 / 상처가 별이 된다
따뜻한 별 같은 단풍잎을 오래된 책갈피에서 찾았다 늦가을 단풍나무가 몇 천 페이지로 묶인 책 같다 단풍나무는 책의 페이지들을 그늘로 내려놓고 붉게 물든 이파리를 끼워놓는다
이슬과 안개와 바람 읽을 것 땡볕이 남겨놓은 그림자 읽을 것
책갈피 속엔 알록달록 늦가을 이파리들이 떨어진다 한 번쯤 벌레가 먹다 버린
겨울부터 봄까지 단풍나무 책을 따뜻하게 덥힐 빨간 문양
여름 가을 지나도록 상처 하나 없는 잎은 온전한 것들이 아니다 상처가 잘 물들어 단풍 되듯 우리의 상처도 사랑으로 별이 된다
이명덕 시인 / 별꽃
벌 나비 한 마리 날아올 수 없을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허름한 잔등
물안개 품은 숨결이 드나들고 있다
제때 눈길 한번 받지 못한 채 새 잎 돋고 저 홀로 지는 여자
수줍은 볼에 주근깨를 달고 조막만 한 꽃이 된 여자
이명덕 시인 / 아름다운 비행은 꿈이 아니다
한강 고수부지 매점 연을 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짧은 끈에 가오리연이 매달려 있다 쇳소리를 내는 강바람이 방향없이 불어치고 살이 꺽어질 정도로 날개를 젖혔다가 매점 지붕에 부딪힌다 바람방향이 맞아 날아오르다가도 확 거꾸러진다 짧은 끈이 낚아채는 것인데 그럴때마다 부딪히며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아니 소리친다 하지만 아파할 틈도 없이 또다시 솟구치고 주저앉고 어쩌면 제몸을 다 부수고서야 끈으로부터 놓여날 것이다 저 연은 매점 한 귀퉁이를 쥐고 날아오르다가 고꾸라지고 요동친다 난다 최선뿐이 없다는 것은 끈의 길이와는 무관하여
영원히 묶여 있지 않는 저 연 시간이흐르면 부서지고 말 연이라는 생각은 감상이다. 부서지는 것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이명덕 시인 / 연
풀어 줘 나 좀 풀어 줘 목련도 새가 되어 날아오르잖아
네가 쥐고 있는 얼레 팽팽하게 감으면 안 돼
더 감으면 탯줄은 끊어지고 뿌리 없는 발이 되어 한순간 나도 모르는 어둠속으로 고꾸라지게 돼
생활의 악다구니, 감옥 같은 굴레 속에서 한 오리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자유 놓치고 싶지 않아
나의 하늘에 살게 해 줘
이명덕 시인 / 우리는 어떤 사물의 내부였다
석수장이는 돌 속에서 땅땅 쪼아 무수한 사람을 꺼내지 조각가는 나무에서 시간을 파내어 온갖 형상을 새기지
사물의 모습이란 모두 겉모습인 것이지 그 사물 속엔 저마다 다른 존재들이 웅크리고 있지
저것 봐, 뜰 안의 느티나무엔 예쁜 젖가슴을 가진 여자가 있고 굴러다니는 돌 속에선 경배의 대상이 도드라져 나오기도 요행히 연기를 피한 나무토막에선 기도문이 새겨지기도 하잖아
깎고 파내다 보면 허드렛일에만 열중해 온 일생이 드러나기도 하겠지만 흙이라는 사물에서 빚어져서 다시 흙 속으로 고요히 눕는 것이지
파내고 깎아내 모아 쥔 한줌 그 한줌으로도 우리는 숨 쉬는 것이지
격월간 『시와표현 』2019년 9 /10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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