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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주 시인 / 혼자 울지 마라
하늘 아래 어떤 슬픔도 온전히 한 존재의 몫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먼 단풍도 홀로 붉지 않는다
한 바람이 서늘한 능선의 가슴을 쓸면 마침내 모든 나무가 서로에게 물들어
가난한 영혼의 연대가 온 산에 붉다
들꽃을 바라볼 때 꽃의 귀는 너를 듣는다
홀로 슬퍼 자기를 연민할 때도 꽃은 피고 사랑은 간다
한 마음 괴롭히는 그 까닭으로 모든 영혼이 운다
우리는 모두 물들어 간다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시인 / 돌배나무
언덕에 돌배나무 한 그루 있다 외따로 있는 돌배나무는 돌담 기울어진 오막살이 한 채를 떠 올리게 한다 험산자락에 화전 터 잡은 부부 낮은 담 두르고 구들 들이고 샘물 길어 나물죽 끓이며 살아갔다 고단한 잠 위로 달빛 건너가고 계곡 밤물은 산벚꽃잎 띄워 흐른다 수수꽃 같은 아이들이 자랐다 콩 한 자루 등짐 메고 능선 넘어 장에 간 아비는 오지 않고 등잔불 그을음만 흙벽에 흔들렸다 돌담 허물어지고 빈 밭에 망초꽃 물결이 돌아왔다 빈집처럼 돌배나무는 늙어갔다 능선에 붉은 달 차오르면 주름진 나무는 제 몸에 흰 등불 걸어 달의 아이를 몸에 받는다 한 생은 꼭 살아본 것 같은 언덕 위 늙은 돌배나무
정용주 시인 / 서정시인
전깃줄에 앉아 제비 부부가 토론을 하고 있다 바짝 다가앉아서 꼬리를 까닥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제법 긴 말로 의논을 하더니 다시 한 번 빙글 날아 집을 돌아보고는 사라졌다 제비가 떠나고 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붉은 벽돌 두른 벽 틈에 시멘트를 이겨 넣고 방부 송판으로 메운 처마, 돌가루에 타르를 섞어 지붕을 씌우고, 노란 페인트를 칠해놓았다 제비에게 금줄을 둘러놓고 들어앉은 서정시인은 오늘도 쓴다 왜 제비는 진화하지 못하는가
정용주 시인 / 반려목
하고 싶은 독백은 이것이 아니었는지 나보다 늙어버린 빈집 속에 기울어 허공이나 먼 하늘 따위 바라보지 않는 백태 낀 눈동자 눈곱 비벼내며 지나온 것이나 돌아갈 것이나 아득한 툇마루 잠깐 비껴가는 햇살 아니면 햇살이 비춘 그림자 같은 것 그을음 묻은 처마에 흙집 한 채 유유히 버려두고 종적 감춘 제비는 기억을 어디에 떠맡겨 유전하나 개 한 마리 양지에 묻고 싹틔우는 곳간 씨감자는 잊으라 어느 시간이 허문 제비집 서까래 폐기와 사이로 흰 감자꽃 한번은 피리라 삐걱이는 평상 발등에 얹은 미루나무 고목아 나 죽거든 가지에 새 앉히지 마라 죽은 나무엔 새가 없다
정용주 시인 / 집 속의 집
전봇대에서 처마로 이어진 전화선 위에 노랑지빠귀 꼬랑지 깃털을 흔들며 지저귄다 그것이 아주 가까운 거리여서 나는 이놈이 반가워 노래 부르는 줄 알고 봄날 아침의 평화를 읊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새는 뒤쪽의 전봇대 꼭대기로 날아가 더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며 눈을 떼지 않는다 내가 돌아서자 새는 쏜살같이 집 속의 집으로 스며든다 나는 얼마나 단단하고 나쁜 가장이란 폭력인가
정용주 시인 / 밥
뼈가 굳어 가는 병에 걸린 그녀는 무허가 지압집 3층 계단을 오르며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신발을 신고 한 칸씩 계단을 오르는 그녀는 어디 가서 밥 먹고 오라고 숟가락을 입에 대는 시늉을 했다
-시집 <인디언의 여자> (2007,실천문학사)
정용주 시인 / 투견 로트와일러
쇠장도리 거꾸로 박아 쇠줄 박아 쇠줄 걸었다 쇠줄에 끌려 개집 앞 부챗살로 쏠렸다
먼저 살던 풍산개 오줌 눈 자리마다 제 오줌을 누었다 똥 눈 자리마다 제 똥을 누었다
흔적들 모조리 치우고 제 흔적을 남겼다
밥그릇에 밥이 차자 잘린 꼬리 대신 궁둥이가 흔들렸다
대가리는 처박은 채 눈만 치켜떠 쳐다본다
*로트와일러: 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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