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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남 시인 / 햇살을 닦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닦는다 책들 사이에 뽀얀 햇빛이 앉아 있다 늘 닦아내건만 다시 기쁨처럼 곁에 와 앉는 너 살아간다는 건 마음을 닦는 일일까 닦아낸 창틀에 내 얼굴이 또 쌓이고 있다
강성남 시인 /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20여 년 나와 함께 한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이사하는 날 담장 밖에 내다 놓았다 집이 좁아 욕심 비웠는데, 마음이 아려 잠이 오지 않았다 누군가 데려가겠거니 며칠 잊고 있었다 소나기 내린 다음날, 밤새 물에 젖었을 텐데 얼룩은커녕 한층 투명한 얼굴이다 물방울 속 이야기들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광을 즐기고 있다 물방울 속 어떤 얼굴은 가시처럼 보이고 어떤 놈은 공작새의 날개, 다이아몬드, 조약돌, 화살표 때로는 행진하는 군인처럼, 매미떼로 또 어떤 날은 꽃밭으로 읽혔다 골목을 몰아가는 물의 도화선으로 내 피를 몰아가는 피톨처럼 읽혔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방울을 거울삼아 나를 들여다볼 때가 많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물방울이 매단 이야기들 내 영혼을 담은 자화상이 아닌가 햇살과 구름, 건너편 창문과 지붕들 지중해 바다를 품고 출렁인다 이 생명들 위해 화가는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으려 했을까 그도 난간에 매달린 채 운 적 많았을 것이다 소중한 줄 모르고 버리려 했던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그가 있어 내 미래가 밝음을 깨닫는다
*김창열 화백 그림,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강성남 시인 / 반려
밥 때문에 숟가락을 들고 뛰던 때가 있었다
어디로도 갈 수 있으나, 어디로도 가지 않고 눈 귀 닫아걸고 살았다
멀리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당신 안에서 내가 끓는 동안 압의 힘으로 우리는 서로의 내부를 통과했다
내부를 통과한 뜨거움으로 참는 법을 배웠고 함께 사는 일이 가능해졌다
강성남 시인 / 저기 불이 켜지네
저기 불이 켜지네 저 불은 무슨 불인가?
-할머니, 저건 석양이에요 저녁노을
시끄러워! 내가 저 볼을 하루 이틀 봤나 참 이상도 하지 저녁만 되면 저기 불이 켜지네
신명아파트 105동 놀이터에 앉아 저녁만 되면 저기 불이 켜지는 까닭에 골똘해하시는 저 어르신이 나보다 심오한 시인 같은데
저녁만 되면 서쪽 하늘에 불이 켜지는 이유 나는 왜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산둥반도 너머 작은 마을이던가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저녁이 올 때면 저 하늘에 이글거리는 햇덩이처럽
내 명치가 서늘해지는 이유 당신은 알고 있을까?
강성남 시인 / 푸른 귀
生버드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립니다
들판 쪽에서 한 떼의 새들이 몰려옵니다 새들의 날갯짓으로 마당 쪽 하늘이 새까맣습니다 두 그루 버드나무 중 잎사귀 무성한 한 나무로만 새들이 몰려듭니다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말들이 빠르게 불어갑니다 아름드리 벌어진 소음이 무성합니다
새들이 순식간에 물어 나른 말들이 허공을 뚫습니다 허공을 벗어난 말들이 가지를 찢습니다 찢어진 가지들이 공중에 길을 냅니다 놀란 나뭇잎들이 숨을 가다듬습니다 가지마다 빽빽이 맺힌 말들이 촉수를 엽니다 잎사귀로 몸을 가린 새들을 나무는 묵인합니다 위기를 감지한 새들이 깃들인 나무는 고요합니다 온몸이 귀가 된 나무의 등줄기에 땀이 맺힙니다 무서운 침묵의 영역을 보는 순간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나무는 자신과 상관없는 말은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내 귓전을 맴돌다 사라진 말들이, 나무의 귀에 닿지 못한 말들이 빗줄기를 따라갑니다 바닥에 남은 몇 잎의 혀가 바람에 몰려다닙니다
태풍이 북상 중입니다
계간 『시산맥』 2015년 가을호 발표
강성남 시인 / 청계대로(淸開大路)
물이 온다 기다리던 답장이 오듯, 합격통지서가 오듯 출렁출렁 물이 온다
청계로와 세종로 골목과 골목을 타고 맑은 물이 온다
담장과 담장 사이 골목과 골목의 어깨를 적시며 모래를 적시며 두근두근 물이 온다
경계를 지우며, 얼룩을 지우며 출렁출렁 물이 온다 키 낮은 풀들 갈증 해소해줄 물이 온다
남산을 한 바퀴 돌아온 물이 북악을 거쳐 온 물과 합류한다 담장 너머 해바라기 덩달아 목을 축인다 출렁이는 길이 나팔꽃 덩굴을 적신다
들깨모종, 고춧대 새끼자리 차오른다 동백이 매화가 무더기무더기 핀다
살겠다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던 오이, 참외, 가지들 다시 싹을 틔운다
교복 입은 아이들 잎눈마다 꼬생이가 생긴다 햇살이 광장을 가득 채운다
알에서 막 깨어난 새들 눈을 뜬다
-계간 《삶이보이는 창》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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