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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시인 / 시
헤엄을 멈추면 숨을 멎는 회유어(回遊魚)처럼 밥상 앞에서 괜히 먹고 있는 사람처럼 시는 애교가 없어 불행하다
바다를 창틀에 눌려 죽게 하는 관조의 천박으로 시는 물결이 흔들어 버린 우리를 책망치 마라 너는 수면에 한 장의 수의(壽衣)를 씌우고 마지막 하루를 촉점(觸點)이 없는 것에 비유하는 법을 배운다
서서히 낡아 가는 것은 자신의 비행이 아니라 허공일 뿐이며 인간의 생각 위를 잘못 내려앉아 부러지는 다리가 철학의 일부일 뿐이라고 착각하며 시는
다급한 변의(便意) 속에 신이 되려는 매일의 나를 물과 함께 내려 버렸다
구름으로 꾸짖고 난 후의 양 떼는 짙고 그건 너희 저녁에 물이 없어서란다, 어느 편의 밤에게도 판단을 가지지 못하게 했다
나의 선대는 남의 슬픔을 가져와 그것을 어린애 모양으로 만들어 파는 종족이었다 '우신(牛腎)에 매달려 목가(牧歌)는 청량해지고 이것이 우는 이유는 이것을 울릴 사람이 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모든 부분의 강청(强請)엔 지상을 건넌 지하의 허약이 있었다
밤을 우려낸 이 침실을 밀밭의 가라지로 덮으며 맞은편 물이 짐승의 발을 좇아 깨끗케 됨을 보고 가로되 이는 피라, 자신에게 길고 긴 어버이를 꽂았던 것처럼 시는
나 역시 눌러 어둠을 터뜨릴 것이다 타인의 결심에 칼을 꽂아 달라던 그날의 박력 있던 병명(病名)도 이제 다시 묵도(默禱)로 돌아가고자 한다
조연호 시인 / 단식斷食
좁고 외로운 방에서 그는 단식을 말한다. 나무들의 금식,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겨울 숲에서 탈진한 빛들이 가지 밖을 걸어 나왔다. 산 아래서 우리의 외로움은 개미들이 물어다 놓은 흙덩이처럼 흐린 날 쪽으로 둥글게 모여 있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채로 또 잠들었고 더러 택시를 잡아타고 아무 데로나 가고 싶었고 아무 여자하고나 正과 反과 合을 얘기하고 싶었다 교문리에 가면 755번 좌석보다 목욕탕 굴뚝이 먼저 하늘로 올라갔다. 배부름과 같거나 비슷해진 말들이 그의 속 에서 텅텅 울린다. 열매 대신 애벌레의 집들을 매달던 나무, 그 밑에서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같은 내용의 편지를 서로 다른 색깔의 편지지에 적었다. 상징이 사라진 날에 우리는 슬펐지만 살찐 비둘기들은 아름다웠다.
조연호 시인 / 풍치지구 略史
비탈의 바람 : 산턱에 텐트를 치고 그 남자는 빨랫줄에 속옷과 물고기를 말렸다. 연인의 분홍빛 손톱처럼 바람에 마르며 숲은 자꾸 두꺼워진다. 형이 불쌍해, 군대 가기 전엔 얼마나 명랑한 사람이었는데, 엎드려 죽은 척 하며 아동들은 관심 가져주기를 원했다. 쉴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너희가 톱니바퀴를 돌릴 수 있는 곳, 모래 속에 산비탈의 바람을 다 묻을 수 있는 곳
쇼노의 비 오는 날 : 거울 안에 넣을 수 있는 것과 거울 밖으로 꺼낼 수 있는 것들을 우린 아직 구별할 힘이 없었다. 구름보다 무거운, 이곳의 기후는 첫 잎보다 떫은 맛. 우린 공기를 사랑했고 겨울옷에 여름옷을 받쳐 입으며 붕대처럼 단단히 말린 화장터의 흰 굴뚝을 바라보았다.
의태(擬態)의 힘 : 망루의 무게는 잃은 길의 무게만큼. 여름은 쉽게 높이를 가지지 못했고 많은 물을 아껴야 했다. 마른 건천에 물결이 하나 필요했지만 구름도 물을 아꼈다. 둥근 것들은 속삭이듯 부화한다. 나비들이 날았고 반쯤 무너진 무덤엔 쥐구멍들이 많았다. 영혼이 거기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아직 그가 부풀렸던 둥근 기억까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깊이 없는 곳 : 차가운 홍차를 마시며 나는 결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저급 무신론자. 기도도 독송도 모르지만, 죽은 것들을 용서 하는 건 신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붉어지는 것은 아직 태양에게 더 많은 먼지가 필요하다는 뜻.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헐벗은 가지들이 우듬지로 올라가 깊이가 없는 곳까지, 뛰었다.
자살법 : 조금이라도 견디지 않으면 아이들은 또 물체주머니를 잃을 것이고 열매 없는 가지는 무정한 계절의 마디 하나를 꺾을 것이다. 웃는 가면을 끌어안고 너희는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울었다. 혁명시절의 사람들을 나는 나보다는 좀 더 고백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굴뚝과 친해지는 방법? 그런 건 바람이나 알 수 있는 일. 한 사람을 다 태우고 흰 연기는 구름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리에 오전 내내 떠있었다. 나는 죽은 기억으로 가득 찬 흰 무균실이 부서진 무허가주택에게 다가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조연호 시인 / 매립지
풀들은 눌은 벽지처럼 매립지 바깥쪽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라면을 끓이며 봉지에 적힌 글들을 조리방법과 첨가물과 맛있게 먹는 법을 내처 읽고 있었다. 유통기한이 딱 하루 남은 이 고결한 식사. 내가 묻힐 것이고, 나보다 먼저 버려진 것들이 묻혔고, 버려진 것 이전에 산 것들이 묻힌 매립지, 내가 노려보았던 자들을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넝마꾼이 되어 주워올릴 수도 있으리. 어두운 영화관 좌석에서 애인이 몰래 피우던 담배연기는 태양에 가깝게 다가간 바람처럼, 내가 쓴 愚問처럼 쉽게 부서졌다. 면사같이 가늘고 긴 기억이 국수틀에서 뽑혀 나왔다. 풀들은 수상하게 매립되어 있는 길로는 걷지 않는다. 나는 아무 무게도 없이 코피를 흘렸다. 꾹꾹 눌러 담은 쓰레기들, 그 위로 얇게 덮인 흙, 그 위로 다시 트럭들이 지나다녔다.
조연호 시인 /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물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진 도시에서 바늘은 레코드판의 홈을 따라 걷고 길은 잡음들로 무성했다. 시큼하거나 혹은 알싸하거나, 그늘이 나무 아래서 고두밥처럼 부글거리며 익어간다. 그 흔한 시월의 나무를 따라 걸어도 아픈 말은 흔하지 않았다. 메뚜기 앞이마 같은 집을 얻었구나, 내 방을 둘러보고 할머니가 말했다. 세상의 끝 어디쯤에선가 번데기들이 평화로운 진자처럼 흔들렸다. 세상을 연민하며 시계들이 일제히 뻐꾸기 소리를 울렸다. 오랫동안 모아온 흠집 난 레코드와 구겨진 수첩은 소리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걷는다. 이별편지 위에 쓰인 내 이름이, 통합공과금 영수증 위에 찍힌 내 이름이 서글퍼 보였다.
조연호 시인 / 물고기다운 것 - 바루흐에게
우연이 우는 소리는 순(筍) 끝에서 들린다
창의 나뭇가지는 어둠으로 깊어서 액자 속의 겨울을 夜不答白이라는 말로 채우고 있었다 밤은 일부분인가요, 대부분인가요? 아픔이 사물의 견해에 달려 있는 곳에서 빈 손바닥은 묻고 있었다
못 찾는 곳에 있는 사람 시다림(尸茶林)에서 기다리는 사람 그리고 스올(sheol)에서의 하루
하녀들이 가여워 하녀보다 못한 엄마도 가여워 하지만 봉지에 담겨 있던 내 짝사랑이 아버지로부터 온다는 것이 제일 가여워
부끄러워 물 밖으로 입을 꺼내는 곳 물고기는 밤의 회전목마를 따라 돌며 성에 눈뜬다 양염(陽炎)이 속삭였던 말로 혼자 있을 때의 말투로 종려나무를 밀고 때려본다 이 문을 드나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의 순혈과 구름의 혼혈뿐이다
조연호 시인 / 금요일의 자매들
가출 중인 여자애의 가짜 속눈썹은 길고 아름다웠다. 태양의 섶 아래 은백양 잎이 번데기를 달고 흔들린다. 과수원 딸년들이 모여 가난을 다 덮고도 남을 긴 주름치마를 만든다. 내 일생엔 한 장짜리 편지조차 쉽지 않다고 낭하의 여자가 말한다. 텅 빈 가지 안쪽에서 여름 내내 여름만 기다리던 그녀들의 떨켜. 금요일엔 자매들이 매화나무 그늘 아래서 황록색으로 익어간다. 여름이면 마룻바닥에 누워 빨강머리 앤에게로 영혼을 떠나보내던 흰 팔뚝 위를 개미들이 더러 걸어갔을 것이다. 자매들은 치마폭에 담아온 햇살을 다듬으며 쪽파처럼 앉아 있었다. 막내가 소리 내어 일기를 읽으면 반쯤 열린 장롱 문짝이 딱딱하고 네모난 냄새들을 꺼낸다. 엄마의 갑상선이 온도계처럼 정확히 먼지의 체온을 짚어내던 날, 느릅나무의 貧益貧이 창가를 서성인다. 가출 중인 여자애의 언니들에게 금요일이 찾아온다. 교미가 끝난 구름은 흐린 강의 상류에서 느리게 서로를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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