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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선 시인 / 함박꽃 피다
이가 모두 빠진 할머니가 아직 이도 나지 않은 아기와 마주보며 웃는다
함빡
할머니 잇몸도 아가 잇몸도
붉다
서대선 시인 / 꽃다지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 거는 소리
서대선 시인 / 천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
덮어 주세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제 육신 위로
눈물과 회환과 절절한 그리움을 붉고 붉은 비단위에 써 내려가신 그 마음으로 저를 덮어 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징검다리를 건너 복사꽃 만발한 과수원을 지나 까치가 제 먼저 알고 까악까악 우는 마을 어귀를 지나 제게 오실 그리운 당신 이제 우리가 되어 미래로 가는 시간 속에서 당신 마음을 이불처럼 덮고 천년 동안 춥지 않을 거예요
보랏빛 쑥부쟁이 흐드러진 둔덕에 철 늦은 나비 찾아 드는 날 모습도 희미해진 봉분 위에 기대어 내 살점과 당신의 눈물로 쩔은 붉은 비단에 씌어진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싶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대선 시인 / 어느 재의 수요일* 저녁
베이비 박스에 담긴 아기 문 밖의 아기 날개 반쯤 접힌 백발 한 분 닫힌 문 열고 절뚝이며 다가와
길 위의 아기 보듬어 안고 닫힌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서대선 시인 / 탁본拓本
네 위로 나를 포개어 보는 먹물에 흠씬 젖어 네 위에 엎어져 보는 팔만대장경 혹은 월인천강지곡 같은 사람.
-시집 『빙하는 왜 푸른가』에서
서대선 시인 / 그런 사람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네 아주 눌러 앉아 살고 싶네
눈의 나라 라플란드에 사는 사미족들은 눈의 이름을 삼백 개나 붙여 주었다는데 삼백 개나 되는 내 모습을 읽어내는 그런 사람 있으면 삼백육십오일 심심하지 않겠네 매일매일 새 날 맞으며 두근거리겠네
눈의 나라 눈 세상에서 새로운 눈의 이름을 새록새록 찾아내는 라플란드 사람 같은 그런 사람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네 아주 눌러 앉아 살고 싶네
-《열린시학》 2019.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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