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서대선 시인 / 함박꽃 피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
서대선 시인 / 함박꽃 피다

서대선 시인 / 함박꽃 피다

 

 

이가 모두 빠진

할머니가

아직 이도 나지 않은

아기와

마주보며

웃는다

 

함빡

 

할머니 잇몸도

아가 잇몸도

 

붉다

 

 


 

 

서대선 시인 / 꽃다지

 

 

눈 내린 새벽

 

남의 집 살러가는

열두 살 계집아이

등 뒤로

 

눈 속에 묻히는

작은 발자국

 

멀리서 대문 닫아 거는 소리

 

 


 

 

서대선 시인 / 천년 후에 읽고 싶은 편지

 

 

덮어 주세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제 육신 위로

 

눈물과 회환과

절절한 그리움을

붉고 붉은 비단위에

써 내려가신

그 마음으로 저를 덮어 주세요

 

당신의 마음이

징검다리를 건너

복사꽃 만발한 과수원을 지나

까치가 제 먼저 알고

까악까악 우는 마을 어귀를 지나

제게 오실 그리운 당신

이제 우리가 되어 미래로 가는

시간 속에서

당신 마음을

이불처럼 덮고

천년 동안 춥지 않을 거예요

 

보랏빛 쑥부쟁이 흐드러진 둔덕에

철 늦은 나비 찾아 드는 날

모습도 희미해진 봉분 위에 기대어

내 살점과 당신의 눈물로 쩔은

붉은 비단에 씌어진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읽고 싶어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서대선 시인 / 어느 재의 수요일* 저녁

 

베이비 박스에 담긴 아기

문 밖의 아기

날개 반쯤 접힌 백발 한 분

닫힌 문 열고

절뚝이며 다가와

 

길 위의 아기 보듬어 안고

닫힌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서대선 시인 / 탁본拓本

 

 

위로

나를 포개어 보는

먹물에 흠씬 젖어

네 위에 엎어져 보는

팔만대장경

혹은

월인천강지곡 같은

사람.

 

-시집 『빙하는 왜 푸른가』에서

 

 


 

 

서대선 시인 / 그런 사람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네

아주 눌러 앉아 살고 싶네

 

눈의 나라 라플란드에 사는 사미족들은

눈의 이름을 삼백 개나 붙여 주었다는데

삼백 개나 되는 내 모습을 읽어내는

그런 사람 있으면

삼백육십오일

심심하지 않겠네

매일매일 새 날 맞으며

두근거리겠네

 

눈의 나라

눈 세상에서

새로운 눈의 이름을

새록새록 찾아내는

라플란드 사람 같은

그런 사람 있다면

 

그곳에 가고 싶네

아주 눌러 앉아 살고 싶네

 

-《열린시학》 2019. 겨울호

 

 


 

서대선 시인

1949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2009년 시집 <천년 후에 읽고싶은 편지>로 작품활동 시작. 2013년 《시와 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레이스 짜는 여자』 『빙하는 왜 푸른가』. 2014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상(문학부문). 현재 신구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저널 21 문학 담당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