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현미 시인 / 마음을 바꾸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
강현미 시인 / 마음을 바꾸면

강현미 시인 / 마음을 바꾸면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아침마다 방문을 열고 시어머니의

안색을 살핍니다.

오늘도 차도가 없겠구나 생각하니

살아가는 나날이 힘겹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마음을

바꿔먹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이  두터운 내 업장(業障) 탓.!

그 업장을 소멸할 기회가 주어졌다

생각하니 시어머니를 모시게 된 것이

여간 고맙지가 않았습니다.

마음을 바꾸니 몸도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풍경소리>에서

 

 


 

 

강현미 시인 / 노름판

 

 

삼팔광땡을 노리고 섰다판에 나섰다

청춘을 판돈으로 걸고

오가는 손길 속에 치열한 눈치작전

표정을 들켜선 안 된다

노다지 캐듯 단번에 한몫 보려는 심사

이 판에 전부를 건다

 

짜고 치는 속임수

내가 울면 네가 웃는 세상

마지막 화투 한 장에 희비가 엇갈렸다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다

타짜가 되고 싶었으나 들러리 신세

젊음을 탕진하고

기웃기웃 노름판을 떠날 수 없는 사람

개평 인생으로 전락했다

 

첫 끗발이 개 끗발이었다

 

 


 

 

강현미 시인 / 두루마리 인생

 

 

고양이 발톱에 휴지가 다 풀렸다

몇 번을 되감아 봐도

반듯한 제 모습을 찾지 못하고 먼지만 날렸다

문득 되돌릴 수는 없고 풀리기만 하는 휴지가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다

 

마디를 되짚어간다면 반듯하게 되돌아갈 수 있을까

엉킨 뭉치를 차분히 풀어낼 수 있을까

가끔 구멍이 나 있어도 무사히 건너뛸 수 있을까

잘못 뜯은 실수를 또 되풀이하지 않을까

 

지금은 알 수 없는 일

과거는 모퉁이를 돌아갔고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먼 훗날 내가 다 풀려 마지막,

딱딱한 심지가 드러나도

괜찮은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대충 감아 두툼해진 휴지를 지켜보는

고양이의 눈이 묘하다

 

 


 

 

강현미 시인 / 발정난 세상

 

 

춘정이 동한다는 말은 거짓말

진화된 인간들은 사철 발정을 한다

발기가 안 된다며 비아그라를 먹고

돼지도 아닌데 최음제를 먹고

흔적이 남지 않는 물뽕을 마시게 한다

 

화장실에서 옆 사람과 크기를 가늠하는 남자들

자랑처럼 연애 무용담을 늘어놓고

상대방은 부러움에 입맛을 다신다

어떤 교수는 격려한다고 어깨를 만지고

친근감의 표현으로 엉덩이를 만졌다고 변명을 한다

발끈하면 별 것도 아닌데 일을 크게 만든다고 핀잔이다

세상은 21세기인데 의식은 원시인

종족 번식의 본능에 충실한 남자들

보이지도 않는 활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강현미 시인 / 너의 섬이 되고 싶다

 

 

바다위에 떠있는

외로운 돗단배 하나

나는 그 곁에

작은 섬이고 싶다

 

작은 파도에도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너를 보며

내볼에 흐르는 눈물 흠처

저 파도 속에 묻는다

 

빈 배 저어오는

네 모습이 힘겨움에

나는 네곂에

작은 섬이고 싶다

 

갈매기 벗 되고싶어

네 머리위로 날으니

가다가 힘이들면

갈매기 벗삼아

 

이뿐 숲 우거지고

그림같은 작은 집이있는

너의 작은 섬에 머물러

편안히 쉬이려므나

 

 


 

 

강현미 시인 / 월하미인

 

 

우리 집에 미인이 살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그녀는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월하미인

몇 년에 딱 하룻밤 조용히 다녀간다

그녀가 슬쩍 얼굴을 내밀어도

어쩌면 우리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가끔 이파리를 닦아주며 상상해 본다

어딘가에 숨겨둔

공작을 닮은 그녀의 화려한 꼬리를

 

어느 날 달빛에 이끌려 뜰에 내려서면

그녀가 와있을까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처럼

 

그 밤, 우리는 말없이 오래 마주 보고

 

꿈인 듯 하룻밤이 지나고 맞이한 아침.

향기만을 남긴 채

미인은 사라질 것이다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월하미인 : 공작선인장의 개량종으로 하룻밤 동안 흰 꽃을 피움.

 

월간 <see>. 2017.8월호

 

 


 

 

강현미 시인 / 엄마는 우주인

 

엄마가 우주인이 되었다

투명한 줄 하낭에 의지해 사는

말을 잊은 채

고갯짓과 눈빛으로 나와 교신한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서둘러 식사를 준비한다

가느다란 관을달아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인다

그 옛날 나를 안고서 젖병을 물렸을 엄마

나는 우주선침대에 기대게 한 채 먹인다

 

나도 한떄 우주인이었다

뱃속의 태아일 때 컴컴한 자궁 안에서

엄마와 탯줄로 이어진 채 양수 속을 유영했다

"아가야 자니" 엄마의 말 한마디에

발길질을 했으리라

 

TV 화면에서 사람들이 헤어지는 장면이 나오자

엄마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나는 어떤 이별이 덜 아플까 생각한다

끝없는 우주공간으로 떠나야 할까

아니면 블랙홀로 순간 사라져야 할까

 

그러고보니

사람들은 무주 우주인인 것 같다

우주인으로 탱어나 우주인으로 生(생)을 마감하는

다만 그 사실을 잊고 있을 뿐

 

벽에 걸린 엄마 사진은 젊디젊은데

사진 속 엄마보다 더 나이든 나는

이제 우주 관제소가 되어 힘들게 엄마를 제어한다

 

누워있는 엄마의 야윈 등을 어루만진다

어서 일어나 지구로 돌아오라고

 

 


 

강현미 시인

서울 출생, 계간 《시현실 》 2017년 봄호 신인상 수상하며 등단. 동안문학회 회원. 시산맥 특별회원. 한국예술인 복지재단 창작준비금 지원 수혜. 시집 『거미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