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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 시인 / 인생
내 인생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생각됐던 때의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
그러나 내 인생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윽고 그 남다르지 않은 인생들이 남다르지 않게 어우러져가는 큰길에 줄지어 서서
이 늘비함을 따라가야 할 뿐 슬며시 도망 나갈 외딴길이 없다는 낭패감
이선영 시인 / 늙음에 관하여 눈에 보이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따라간다 육체가 먼저 가자고 하는 것이다 늙은 그는 내어줄 것 다 내어줘 뼈만 남았고 늙은 그녀는 힘에 부치는 몸뚱이를 어쩌지 못해 끙끙댄다 그의 육체는 늙어서 그에겐 늘 모자랐고 그녀의 육체는 늙어서 그녀를 넘쳐났다 육체가 가자고 하는 대로 따라나서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늙었다, 그녀는 늙었다, 는 것을 모두가 안다 육체가 망가져가고 있다는 것을 그와 그녀는 더 이상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숨기지 못한다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육체는 지쳐서 이제 사납게 군다 늙을 것이다 어떻게? 이직은 젊은 육체에 조심스럽게 묻는다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창작과 비평사)에서
이선영 시인 / 일서리 노래
치르륵치르륵 치르륵치르륵 새벽부터 내리는 호우특보의 장맛비를 헤치고
일터로 간다, 나는야
하루 일당의 숭고함과 절박함을 위해 치르륵치르륵 마다치 않고 빗속을 가게 될 줄은
동댕이쳐진 실패 닮은 평생임을 눈치채고서도, 짐짓 그럴 리 없다는 듯 죽으면 맛도 없어지는 놀래미처럼 몸을 움직여 꾸역꾸역
살고 살고 살아가리
태양은 늘 멀고 눈부신 그대련만 퀴퀴한 이부자리 위에서도 손가락 박자를 타게 만들며 생활은 거리의 음악패같이 졸라 대고
넘으며 넘으며 살아가리 지금은 비록 일당 벌러 장맛비 속에 여의치 않은 여정을 가지만 치르륵치르륵 빗소리도 가을 벌레만큼 울어라
어느 낭떠러지에서 돌연 ㄱ자로 꺾여 구르더라도
그날까지는 사랑하는 측은한 얼굴들이여 다정하지만 손길이 거칠어진 일손들이여
서리나게 몸서리나게 살아가리
이선영 시인 / 산수유나무
처음부터 그는 나의 눈길을 끌었다 키가 크고 가느스름한 이파리들이 마주보며 가지를 벋어올리고 있는 그 나무는 주위의 나무들과 다르게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기 위해 잠시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산수유나무라고 했다 11월의 마지막 남은 가을이었다 산수유나무를 지나 걸음을 옮기면서 나는 이를테면 천년 전에도 내가 그 나무에 내 영혼의 한 번뜩임을 걸어두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되풀이될 산수유나무와 나의 조우이리라는 것을 영혼의 흔들림을 억누른 채 그저 묵묵히 지나치게 돼 있는 산수유나무와 나의 정해진 거리라는 것을
산수유나무를 두고 왔다 아니 산수유나무를 뿌리째 담아들고 왔다 그 후로 나는 산수유나무의 여자가 되었다
다음 생에도 나는 감탄하며 그의 앞을 지나치리라
이선영 시인 / 풋것, 아이 혹은 시인
‘왜 마음을 깨뜨리려고 해!’ 불쑥,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온 아이의 말에 내 말이 막힌다 아직 일상어와 관용어에 눈뜨지 못한, 아니 말의 오래된 질서를 겁내지 않는 너의 무지, 너의 무감각, 너의 저돌, 너의 파격
이선영 시인 / 주황 감
어머님이 감을 깎아 접시에 그득 내어주신다
다른 과일들은 약을 먹고 자라지만 감은 약을 치지 않아도 잘 자란다고 어머님은 쑹덩쑹덩 썬 감을 내 앞에 들이밀며 나직나직 말씀하신다
나는 주황 감 한 조각을 마른 혀 속에 밀어 넣는다
생후 3주일 된 갓난아기가 인큐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주사바늘을 꽂고 산소 호스를 대고 아이로손 브라카닐 리나치올......시럽
그 조그맣게 움을 틔운 몸에 지독한 약을 쳤다 벌레 먹지 말라고 일찌감치 약을 쳤다
간이침대에 실려온 사람들이 고개를 간댕간댕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한차례 약을 칠 모양이다
미끈미끈한 감 한 조각을 한 입씩 베어 물고 입안에서 천천히 씹었다 내가 감나무였어야 했다 주황 감 주렁주렁 매달린 나를 매단 것도 감나무였어야 했다
- 시집 {일찍 늙으매 꽃꿈} (창자과비평)
이선영 시인 / 길이 아닌 길
저렇게 잘 닦인 길이 왜 내 길이 아닌가?고 눈에 한참 밟히던 길이 있었다 아마 원주나 제천 가는 길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줄지어 가는 차들의 행렬에 끼여 있었다 세상엔 내가 알거나 모르는 수많은 갈래의 길이 있지만 그 길들은 그저 멀거나 조금 가까운 갈랫길일 뿐 내가 밟고 가는 길은 늘 하나의 길일 수밖에 없다 흔한 발자국들 찍힌 세상의 흔한 길들 중 하나가 될지라도 저 의젓한 길은 어디로 향하는가, 여직껏 나와 다른 길을 밟아온 길, 내게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으면서 그러나 나와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는 저 길은 어떤 까닭으로 이리로 이어져서 어떤 추억과 상처의 바퀴를 굴리기 위해 벋어 있는가, 저 길을 통해 다다를 수 있는 곳은 낯선 천국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낯선 오지라는 것인가, 저 길은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할 그 길을 나는 한동안 가슴에 담았었다 내 갈 길이 아닌 그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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