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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리 시인 / 가을비 오는 밤엔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이해리 시인 / 나비
폴폴폴 날아다니던 나비가 풀잎 위에 가 살포시 앉을 때 그 조용한 착지가 내 가슴에 작은 오솔길을 낸다 오솔길 끝에 앉아 풀잎에 앉은 나비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가늘고 쪼끄만 몸통에 견주어 날개는 돛대만 하다 나비에게 날개는 자유이자 족쇄이다 그 가볍고 무거운 두 낱 애상을 저어 꽃에 닿으러 가는 나비, 나도 내 마음의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슬픔을 저어 시의 꽃밭에 닿고자 바람의 수풀 속을 날아다닌다
이해리 시인 / 왜 못이라고 부르더냐 -수성못 1
왜 못이라고 부르더냐 모습에 견주어 무뚝뚝한 이름이더냐 갖가지 꽃나무가 바람에 한들거리는 도심 복판 푸른 호수
일본인이 판 저수지라 못이더냐 저항시인 상화의 詩라서 빼앗긴 들이더냐
오늘 대구시민 한 사람은 나라 뺏긴 때보다 살기 어렵다 말하고 어제 서울 기자 한 사람은 절망의 도시 대구라 지면에 썼구나
아서라 사람들아 표면에 서서 수심을 말하지 말거라 대저 못이란 고여있는 듯 흐르는 물, 흐르는 듯 지켜보는 하늘 닮은 눈
대구는 무뚝뚝한 듯 정 많은 사람이 겉보다는 속으로 사랑하며 사는 곳
살기 어려워도 여기에 절망해도 여기에
일이 년이 아니라 백 년 가까이는 살아봐야 그 아름다움의 근원이 물에 어리느니
이해리 시인 / 낙동강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품고 살았다 가슴이 늘 축축 했다 찬물에 이마 닦은 물풀의 얼굴로 기슭에 서보면 이유 없이 속이 아파 속을 꺼내 씻고 싶다던 어머니 생각이 난다 갓 난 동생을 업고 싸르륵싸르륵 걸어가던 어머니 영문도 모르고 따르던 어린 강변 길 들깨밭을 스쳐온 바람과 햇볕의 눈부심이 이상하게도 슬펐다 징용에서 돌아온 할아버지와 눈썹뼈 깊이 戰傷한 아버지를 내력으로 둔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시커먼 폐수에 몸 담고 살았던 기억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구비 구비 기쁨보다 슬픔 휘돌아쳤지만 슬픔도 잘 저어가면 맑은 피안에 닿으리라 이제는 찰랑대는 물 위에 빈 나룻배 하나 띄워 놓는다 반쯤 물에 잠긴 나룻배 안에 화르륵화르륵 떨어진 벚꽃잎, 들여다 보면 거기 어리는 얼굴 하나, 그 얼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어주기 위해 흘렀던 강이었음을 안다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품고 살았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어주기 위해 흘렀다 가슴이 늘 축축 했다
이해리 시인 / 꽃비 맞고 서 있으면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하나 지녔는가 떨어지는 꽃잎이 나에게 묻는다
가장 귀한 것 가장 아름다운 것 다 쏟아 부어서 더 흐뭇한 사람 하나 가졌는가 한 번 더 묻는다
대답 못해 머뭇거리는 사이 어떤 꽃잎은 뺨이나 속눈썹에 날아와 한 참을 머물다 간다
그 연분홍 향내에 그만, 알 수 없는 눈물이 난다.
- <사람의 문학> 봄호-
이해리 시인 / 저무는 수성못
저물녘에 너 없는 수성못 사진을 찍으면 슬픔이 인화되어 나온다 어스름을 끌어당겨 검어진 풀과 잎 지평선 저 너머로 돌아가는 일몰과 일몰에 취해 불그레한 하늘, 이제는 쉬어야겠다고 문을 닫는 물빛과 꽃잎 사이에 누울 자리 펴는 바람 저물녘엔 모두들 어디론가 돌아가려 한다 나도 귀소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 너 없이는 하늘도 아픈 듯 불그레하고 땅도 서로운 듯 거무레한 이런 저물녘엔 집보다 외로운 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사랑보다 쓸쓸한 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이해리 시인 / 오므라진 나팔꽃 입
할머니들 입은 오므라진 나팔꽃 같다 오므라진 나팔꽃 입들이 서문시장 난전 국숫집 나무의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바퀴벌레 모기약 외치는 행상 옆에서 더럼을 타지 않고 천천히 흐르는 구름같이 느리게 국수를 먹는다 하나같이 뽀글뽀글 볶은 파마머리, 헐렁한 옷 저승꽃 한두 떨기 손등에 피어난 나팔꽃 입술들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들판에 두고 모 심었던, 어쩌면 이 나라 적빈의 들판이 여기까지 오도록 맨몸으로 노역한 세대들 자신을 위해서는 국수 한 그릇도 아끼다가 저무는 나팔꽃 입술이 되고서야 힌 그릇 국수에 노년의 미각을 맡긴다 가제 손수건 풀어 꺼내는 국숫값 삼천 원이 더디고도 더뎌서 연민의 넝쿨이 내 마음을 휘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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