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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지웅 시인 / 유랑의 풍습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
박지웅 시인 / 유랑의 풍습

박지웅 시인 / 유랑의 풍습

 

 

전생에서 내 가져온 재물인가

슬픔에게 바치는 서글픈 뇌물인가

한숨이여, 기억이 남긴 몹쓸 유산이여

무너진 흙더미 같구나, 내 불쌍한 행복아

내 생을 출발시킨 무관심한 봄은

어디로 갔는가, 가벼운 협박처럼 나를 쫓는

햇살 피해 나 울적한 그늘에 앉았네

가을은 계급장 떨어진 보병 같은 나무를

내 앞에 세워두고 또 가버리고

동의하지 않은 이 유랑에 대해

초췌한 철학은 한 번도 설명하지 못했네

나 공연히 일어나 이생으로 넘어왔네

나는 왜 나에게 죽음을 전수했는가

 

 


 

 

박지웅 시인 / 심금(心琴)

 

 

그때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후, 한 팔을 잃은 연주자는

남은 팔을 자주 꿈속에 집어넣었다

악몽에 자꾸 손이 갔다

도로에 떨어진 팔을 찾아

꿈의 꿈속까지 들어가 뒤졌다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싶을 때

기댈 곳이 꿈밖에 없었다

가끔 새소리를 좇다 기묘한 길로 들어섰다

꿈의 밑바닥에서 자란 넝쿨을 타면

나뭇잎에 붙어 있던 새소리가

까마득한 아래 소리의 묘지로 떨어졌다

한 손으로 팔의 무덤을 헤치자면

여지없이 땔감보다 못한 썩은 팔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 끌어안고 있으면

죽은 팔이 마음속으로 밀려들었다

하룻밤 하룻밤 또 하룻밤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아

만질 수 없는 것을 만들었다

이제 숨을 불어넣자 가늘게 소리가 눈을 떴다

연주자는 없는 팔로 악기를 들었다

불행 없이는 울리지 않는 악기가 있다

 

 


 

 

박지웅 시인 / 늑대의 발을 가졌다

 

 

 눈밭에 찍힌 손바닥이 늑대 발자국이다

 나는 발 빠르게 손을 감춘다

 

 손가락이 없으면 주먹도 없다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가 없다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주먹 꼭 쥐고 이별해보는 것, 해바라기 꽃마다 뺨을 재어보는 것, 손가락 걸고 연포 바다를 걷는 것, 꽃물 든 손톱을 아껴서 깎 는 것, 철봉에 매달려 흔들리는 것, 배트맨을 외치며 정의로운 소년으로 자라는 것

 

 내 손가락은 너무 맑아서 보이지 않는다, 내 손가락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시는 끝이다, 앞발을 쿡쿡 찍으며 늑대의 발로 썼다

 아래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옷소매로 앞발을 감춘 백일 사진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태웠다 뒤뜰로 가 간장 단지를 열고 손을 넣어보았다 손가락이 떠다니고 있었다, 고추였다, 뼈 없는

 어미 자궁에 네 발의 총알로 박혀 있을 손가락들, 어미의 검은 우주를 떠돌고 있을 나의 소행성들, 언젠가는 무화과나무 위를 지나 갈 것이다

 손가락들이 유성처럼,

 

 


 

 

박지웅 시인 / 칼춤

 

 

고향집에 가면

어미는 칼부터 든다

칼이 첫인사다

칼은 첫 문장이다

도마에 떨어지는 칼 소리

저 음절들을 맞추어 읽는다

부부의 물을 베던 칼

부엌에서 할짝할짝 울던 칼

나를 먹이고 키우던 칼

먼 길 돌아온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칼

어미는 날 앉히고

칼춤을 춘다

 

-시집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에서

 

 


 

 

박지웅 시인 / 물방울 속의 코끼리

 

 

쪽잠 든 내가 낡은 판자처럼 꿈결에 휘감길 때

간이역 옆구리를 연신 이마로 밀어대는 목련나무

 

긴 상아에 넓은 귀 펄럭이는 흰 코끼리라는 홀연한 생각

생각할수록 물의 뒷면이 달아올라 끝내 흠칫흠칫

떨어지는데

 

지그시 물오른 생각의 물방울 하나 이리 들여다보니

나무 바깥으로 쿵쿵 꽃잎은 한 걸음씩 지고

 

쿵쿵 멀어지는 코끼리가 아니라면 밀려온 빙산 한채

북극에서 봄날 공중으로 흘러온 목련은 하룻밤에

생겼다가

멀리 사라지지, 쿵쾅거리는 빙하건 물방울 속의 코끼리건

 

흰색은 뼈의 색, 뼛속에서 자라는 저릿저릿한 폭설의 색

지금껏 몸서리친 내 직장은 백지려니, 어느 잠결에 들었다

종이 속에서 쿠우웅- 무언가 올라오는 소리를

 

봄은 희고 큼지막한 벼랑을 안고 오는데

그 사이사이 꿴 듯 달래듯 맺힌 꽃들이 팔다리에 옮겨붙어

나는 얼음 같은 글자와 함께 아래로 굴러내리곤 했다

 

창가에 곧 터질 듯 물방울의 껍질 같은 달무리와

구겨진 구름 몇 뭉치가 파지처럼 굴러다니는 새벽하늘

옆구리 안쪽에 상아가 백미로 박혀 있곤 했다

 

 


 

 

박지웅 시인 / 터널

 

 

땅은 어둠이란 걸 몰랐다

원래 땅에는 오로지 땅뿐이었다

 

속을 파내자 땅에 눈이 생겼다

땅이 비로소 어둠을 본 것이다

 

시력이 생기고부터

눈먼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땅은 괴로웠다, 칠흑이 드나드는 것이

빛이 드나들면서 괴로운 방향들이 생겼다

 

어둠을 바깥으로 몰아낼 수 없었다

불빛이 도무지 물러나지 않았다

 

땅에 안팎이 생기고

땅은 땅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박지웅 시인 /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박지웅 시인

1969년 부산에서 출생. 추계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계간 《시와 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즐거운 제사〉 당선. 시집 『너의 반은 꽃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7. 제21회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제19회 '천상병 詩 문학상' 수상. 제11회 지리산문학상 수상. 현재 도서출판 '호미'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