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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환 시인 / 공터가 많아서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
김수환 시인 / 공터가 많아서

김수환 시인 / 공터가 많아서

 

 

내가 열지 않으면 내내 닫힌 방들처럼

아무도 여닫지 않는 녹슨 손잡이처럼

자신도 가구가 돼가는 저 늙은 여자처럼

 

인적이 끊긴 골목 가로등 불빛처럼

어쩌지 못해 한 곳만 응시하는 마음처럼

등 뒤에 보이지 않는 시선처럼 그 공허처럼

 

악수하고 돌아서는 손에 남는 외로움처럼

사람도 사람에게 한때라는 생각처럼

나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확인처럼

 

―시집 『사람이 간다』 시인동네, 2024.

 

 


 

 

김수환 시인 / 감자처럼요

 

 

감자는 숨어 있어요 왜 숨었는지 몰라요

남모르게 표정과 마음을 만들었다가

당신도 그때 세상에 나왔던 거였나요

 

숨어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아요

한낮에 숨었다가 쏟아지는 별들처럼

홀연히 나타났다가 다시 숨은 당신처럼요

 

영영 숨는다는 건 영영 못 잊는다는 거

나도 숨고 싶을 때가 많아요 감자처럼요

알알이 당신 같은 감자, 영영 맺으면서요

 

-《좋은시조》2023. 여름호

 

 


 

 

김수환 시인 / 비단실이 술술 한정 없이 나와서

 

 

거기까지는 기맣다

없는 듯이 가맣다

 

가다 서고 가다 서다

어둑시근 나부룩해지던

 

어김질

흑공단같이

막막하던 우리는

 

-《시와소금》2022. 여름호

 

 


 

 

김수환 시인 / 수국

 

 

돌담 너머 수많은 다짐처럼

한 무더기 수국이 수북하게 피었다

수국 옆, 다시 수국이 불면처럼 피었다

 

마릴린 먼로는 마릴린 먼로로

영숙이는 영숙이로

피었다가

진다

 

그 옛집, 그 사람처럼

수북한 다짐이 피었다 진다

 

-《오늘의시조》2022. 제16호

 

 


 

 

김수환 시인 / FM91, 1MHz 뻐꾸기 소리

 

 

한겨울

적막을 쪼는

날렵한 부리 하나

 

명치 끝

그렁그렁 젖었다가 마르던

 

돌아갈

몸 이제 없는

저 푸른 목소리

 

-《오늘의시조》2022. 제16호

 

 


 

 

김수환 시인 / 첩첩

 

 

밤을 새워 만드는 사과파이에 첩첩이 있지

수십 장 종이 같은 마음을 아주 얇게

저미고 밀어 만드는 말 못할 첩첩이 있지

물 마른 진흙 첩첩 비늘도 없는 미꾸라지들이

가쁘게 서로의 몸을 휘감는 첩첩이 있고

그래도 건널 수 없는 첩첩 마음이 거기 있지

첩첩 모퉁이 돌아 첩첩의 고개가 있고

오가는 걸음 첩첩, 얼싸안는 가슴이 첩첩

우리가 함께 못하는 그 평생도 첩첩이지

 

 


 

 

김수환 시인 / 그때 우리는 그랬어야 했다

 

 

이것밖에 돈벌이가 없는 사냥꾼의 갈고리처럼

 

그걸 받는 남극 물개의 털도 없는 머리통처럼

 

쿠울렁, 하얀 얼음에 쏟아지는 악다구니들처럼

 

-《좋은시조》 2023. 여름호

 

 


 

김수환 시인

경남 함안 출생. 2013년 《시조시학》으로 등단. 2018년 《경상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사람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