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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승 시인 / 등으로 오는 사람
모든 씨앗의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는 봄은 오목가슴에 얹힌 겨울을 털어 내는 게 아니라 변종 바이러스를 유포한 셈이다 사방천지 켁켁 터지는 꽃들의 기침소리
그때 내 몸을 빠져나간 것도 동그랗고 세모지고 네모난 나였다, 너였을지도
우리는 서로에게 감염되었다
하여, 너 또 등 돌리고 간다 해도 더는 뼈아픈 그리움일랑 없겠다 사래 들린 미련일랑 없겠다
김미승 시인 / 모래시계
여자를 찾아냈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그녀, 천 년의 형벌을 받고 바위에 눌린 괴물처럼 장롱 밑바닥에 깔려 무너진 수평을 버티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어느 날 열사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그녀의 세상은 푸석푸석 말라 갔다 모래바람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음부를 틀어막았다 젖꼭지에 모래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서히 풍화되기 시작했다
자궁을 적출한 그 여자 모래 시간 속에서 모래 아이를 낳고 ......건재했다
김미승 시인 / 이 빛깔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목욕탕에서 만난 한쪽 젖가슴을 도려낸 그 여자, 서른 중턱을 넘었을까 우연히 몇 번 눈 마주쳤을 뿐인데 쿵, 동백꽃 모감지째 지는 소리 내 늑골의 골골마다 파르르 번져왔네
목젖이 다 보이도록 깔깔대던 그 여자, 아슬아슬 색 참 뜨겁더니 제 색의 무게에 겨웠을까 송두리째 떨군 젖가슴
허둥대는 내 시선을 붙들고 함께 등을 밀자며 미소를 머금었던가 찰진 동백잎 같은 그녀의 등을 밀어주고 함께 우유도 나눠 마시며 그녀를 그냥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뿐이었는데
완강한 신의 주술을 풀고 그 여자 화농의 가슴에 자라난 無憂樹, 사철 푸르른 이 빛깔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미승 시인 / 묵은 김치
잘 있냐. 벨일 없지야 여그는, 잘 있응께 걱정 마라 사방디서 꽃은 펑펑 터져 쌌는디 니 아부지 삭신 쑤신 거 말고는 다 괜찮타 참, 아그들은 학교 잘 댕기냐 작은 놈은 요새도 밥 까탈 부렸쌌냐 누에맹키로 희부닥닥 헌 것이 당최 옹골차지 못해서 걱정이다야 시방도 노상 고뿔을 달고 산다믄서 봄 타믄 입맛도 없을텐디 끼니 잘 챙겨 멕여라 뭐니뭐니해도 밥이 보약잉께 그라고, 애비는 요새도 맨날 늦는다냐 저참에 본께 얼굴이 반쪽이드만 여그, 저 잘 묵던 묵은 김치 쪼깨 보낸다 모냥은 이래도 영판 개미있어야, 귀찮다고 냉동실에 쳐박아 불지 말고 꼭 묵어라 잉?
막 도착한 택배를 푸는데 시어머니 십수 년 묵은 잔소리가 먼저 구시렁구시렁 풍겨나오더라 푸욱, 잘 익은 웃음 한 포기 덥석 들이미는 앞집 여자
김미승 시인 / 아주 오래된 약속
시조새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해와 구름 은밀히 살을 섞는 신의 정원에 불륜처럼 날아오른. 천기를 염탐하다 신의 노여움으로 세상엔 눈이 내리고, 그칠 날 없이 눈이 내리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더운 알을 품은 채 화석이 되어버린 어미 시조새. 오랜 후…켜켜이 쌓인 형벌의 지층을 뚫고 약속처럼 깨어난 새끼 시조새, 등엔 잘려 나간 날개의 무덤을 지고 타박타박 사막을 걷는 낙타.
욱신거리는 어미의 등을 두드리며 아이가 묻는다 - 엄만 왜 자꾸 등이 아파? - 응, 엄만 낙타거든 - 엄마 등엔 혹이 없잖아 - 있잖아, 너희 둘 - 그럼, 우리가 혹이야? - 아니. 날개야, 날…개! 아이는 거울 앞에 모로 서서 제 등을 비추어 본다 거울 속으로 아득히 시조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김미승 시인 / 어떤 탁발
길냥이 한 마리가 내 울타리에 들어왔다 쳐진 아랫배에 마른 젖꼭지 움먹한 눈을 데굴거리며 털 곤두세우더니, 바닥을 끌고 온 품새는 아니게 꼿꼿이 앉아 조곤조곤 나를 뜯어 먹는다 감히 간구하러 왔으면 고분고분 엎드릴 일이지 괘씸해 나도 저를 요모조모 뜯어 먹는다
몇 배를 냈기에 이토록 누추한 몸뚱인지 작은 기척에도 마음 쫑긋거리는지 왜 늘 몸이 먼저 달아나려하는지 정처 없는 눈빛인지
누대를 지켜온 고조할미의 품새로 며느릿감을 살피는 시어미의 눈초리로 팽팽한 시간의 줄을 타다 문득 낯설지 않은 저 모습, 너나 나나 같은 처지가 아니냐!
짠한 마음에 조림 명태 한 조각 던져주었는데 덥석 무는 법이 없다 어미들은, 킁킁 냄새를 맡고, 앞발로 툭 건드려도 보고 자선인지 공양인지 흘낏 묻는 듯도 하더니 비린 생을 물고 표표히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어미는
김미승 시인 / 참 높은, 낙하
다시 염천 아래, 배롱나무 기도처럼 꽃 피웠다 꽃 떨어진다, 사력을 다해 ...........꽃잎 하나가 허공을 버리고 나무 하나가 타오른다, 전 생애를 다해 그렁한 눈동자들 떨어지고
당신은 요양원 유리문에 기대어 너무 오래 울었다 짓물러진 눈이 오래 침묵하였다 안간힘을 쓰며
여름이 떨어지고 계절이 떨어지고 저렇게, 폭폭한 생이 떨어져 내린다. 저 낙하의 민낯 처음 꽃잎이 오므려 쥐었을 석 달 열흘 붉은 기도 하얗게 질려서는 배롱배롱배........
꽃잎이 당도한 곳은 다시, 제 발등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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