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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미승 시인 / 등으로 오는 사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
김미승 시인 / 등으로 오는 사람

김미승 시인 / 등으로 오는 사람

 

 

모든 씨앗의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키는 봄은

오목가슴에 얹힌 겨울을 털어 내는 게 아니라

변종 바이러스를 유포한 셈이다

사방천지 켁켁 터지는

꽃들의 기침소리

 

그때

내 몸을 빠져나간 것도

동그랗고 세모지고 네모난

나였다, 너였을지도

 

우리는 서로에게 감염되었다

 

하여,

너 또 등 돌리고 간다 해도

더는 뼈아픈 그리움일랑 없겠다

사래 들린 미련일랑 없겠다

 

 


 

 

김미승 시인 / 모래시계

 

 

여자를 찾아냈다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그녀,

천 년의 형벌을 받고 바위에 눌린 괴물처럼

장롱 밑바닥에 깔려

무너진 수평을 버티고 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어느 날

열사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그녀의 세상은 푸석푸석 말라 갔다

모래바람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음부를 틀어막았다

젖꼭지에 모래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서히 풍화되기 시작했다

 

자궁을 적출한 그 여자

모래 시간 속에서

모래 아이를 낳고

......건재했다

 

 


 

 

김미승 시인 / 이 빛깔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목욕탕에서 만난

한쪽 젖가슴을 도려낸

그 여자, 서른 중턱을 넘었을까

우연히 몇 번 눈 마주쳤을 뿐인데

쿵, 동백꽃 모감지째 지는 소리

내 늑골의 골골마다 파르르 번져왔네

 

목젖이 다 보이도록 깔깔대던

그 여자, 아슬아슬 색 참 뜨겁더니

제 색의 무게에 겨웠을까

송두리째 떨군 젖가슴

 

허둥대는 내 시선을 붙들고

함께 등을 밀자며 미소를 머금었던가

찰진 동백잎 같은 그녀의 등을 밀어주고

함께 우유도 나눠 마시며

그녀를 그냥 바라보았을 뿐인데

그뿐이었는데

 

완강한 신의 주술을 풀고

그 여자 화농의 가슴에 자라난

無憂樹, 사철 푸르른

이 빛깔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김미승 시인 / 묵은 김치

 

 

잘 있냐. 벨일 없지야

여그는, 잘 있응께 걱정 마라

사방디서 꽃은 펑펑 터져 쌌는디

니 아부지 삭신 쑤신 거 말고는

다 괜찮타

참, 아그들은 학교 잘 댕기냐

작은 놈은 요새도 밥 까탈 부렸쌌냐

누에맹키로 희부닥닥 헌 것이

당최 옹골차지 못해서 걱정이다야

시방도 노상 고뿔을 달고 산다믄서

봄 타믄 입맛도 없을텐디 끼니 잘 챙겨 멕여라

뭐니뭐니해도 밥이 보약잉께

그라고, 애비는 요새도 맨날 늦는다냐

저참에 본께 얼굴이 반쪽이드만

여그, 저 잘 묵던 묵은 김치 쪼깨 보낸다

모냥은 이래도 영판 개미있어야,

귀찮다고 냉동실에 쳐박아 불지 말고

꼭 묵어라 잉?

 

막 도착한 택배를 푸는데

시어머니 십수 년 묵은 잔소리가 먼저

구시렁구시렁 풍겨나오더라

푸욱, 잘 익은 웃음 한 포기

덥석 들이미는 앞집 여자

 

 


 

 

김미승 시인 / 아주 오래된 약속

 

 

 시조새가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해와 구름 은밀히 살을 섞는 신의 정원에 불륜처럼 날아오른. 천기를 염탐하다 신의 노여움으로 세상엔 눈이 내리고, 그칠 날 없이 눈이 내리고, 아직 깨어나지 못한 더운 알을 품은 채 화석이 되어버린 어미 시조새. 오랜 후…켜켜이 쌓인 형벌의 지층을 뚫고 약속처럼 깨어난 새끼 시조새, 등엔 잘려 나간 날개의 무덤을 지고 타박타박 사막을 걷는 낙타.

 

 욱신거리는 어미의 등을 두드리며

 아이가 묻는다

 - 엄만 왜 자꾸 등이 아파?

 - 응, 엄만 낙타거든

 - 엄마 등엔 혹이 없잖아

 - 있잖아, 너희 둘

 - 그럼, 우리가 혹이야?

 - 아니. 날개야, 날…개!

 아이는 거울 앞에 모로 서서

 제 등을 비추어 본다 거울 속으로

 아득히 시조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김미승 시인 / 어떤 탁발

 

 

길냥이 한 마리가 내 울타리에 들어왔다

쳐진 아랫배에 마른 젖꼭지

움먹한 눈을 데굴거리며 털 곤두세우더니,

바닥을 끌고 온 품새는 아니게

꼿꼿이 앉아

조곤조곤 나를 뜯어 먹는다 감히

간구하러 왔으면 고분고분 엎드릴 일이지

괘씸해 나도 저를 요모조모 뜯어 먹는다

 

몇 배를 냈기에 이토록 누추한 몸뚱인지

작은 기척에도 마음 쫑긋거리는지

왜 늘 몸이 먼저 달아나려하는지

정처 없는 눈빛인지

 

누대를 지켜온 고조할미의 품새로

며느릿감을 살피는 시어미의 눈초리로

팽팽한 시간의 줄을 타다 문득

낯설지 않은 저 모습,

너나 나나 같은 처지가 아니냐!

 

짠한 마음에 조림 명태 한 조각 던져주었는데

덥석 무는 법이 없다 어미들은,

킁킁 냄새를 맡고, 앞발로 툭 건드려도 보고

자선인지 공양인지 흘낏 묻는 듯도 하더니

비린 생을 물고 표표히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어미는

 

 


 

 

김미승 시인 / 참 높은, 낙하

 

 

다시 염천 아래,

배롱나무 기도처럼 꽃 피웠다

꽃 떨어진다, 사력을 다해

...........꽃잎 하나가 허공을 버리고

나무 하나가 타오른다, 전 생애를 다해

그렁한 눈동자들 떨어지고

 

당신은

요양원 유리문에 기대어

너무 오래 울었다 짓물러진 눈이

오래 침묵하였다 안간힘을 쓰며

 

여름이 떨어지고

계절이 떨어지고 저렇게,

폭폭한 생이 떨어져 내린다.

저 낙하의 민낯

처음 꽃잎이 오므려 쥐었을

석 달 열흘 붉은 기도 하얗게 질려서는

배롱배롱배........

 

꽃잎이 당도한 곳은

다시, 제 발등 위다

 

 


 

김미승 시인

1968년 전남 강진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9년 계간 《작가세계》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네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익어 가는 시간이 환하다』. 청소년소설 『세상에 없는 아이』 『저고리 시스터즈』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 동화 『잊혀진 신들을 찾아서, 산해경』, 『상괭이와 함께 떠나는 다도해 여행』, 『서방바위와 각시바위』, 『소곤소곤 설화모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