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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석규 시인 / 산사 일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2.
김석규 시인 / 산사 일우

김석규 시인 / 산사 일우

 

 

목어 꼬리에 낮달이 졸고 있다.

텅 빈 적묵의 고무신 파르라니

법당 귀 닳은 섬돌 아래

다소곳이 합장하고 섰는 석탑 그림자

불두화 그늘에 떠내려간다.

흰 그름 흘러가서 또 몇 만 리

굽이 돌아간 저 아래의

잊혀진 인연 하나도 새삼 무거운데

눈썹 아래 연연히 물드는 서쪽

삼천 대천 소리없이 타고 있다.

 

 


 

 

김석규 시인 / 골치

 

 

처리된 방사능 오염수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굳이 바다에다 쏟아 버릴

이유가 무엇인가

저수지를 만들어 가두어

두었다가

혹심한 가뭄에는

농업용수로 쓰거나

하늘을 찌르는 생산 시설의

공업용수로 쓰거나

도시의 하수관로와 연결해

처리하면 될 것을

왜 이웃 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을 끓게 하는지

 

 


 

 

김석규 시인 / 우리 동네 이야기

 

 

마흔 해 훌쩍 넘도록 살고 있는 동네

안면 터서 수인사하고 호형호제하던 사람들

이제는 눈 닦고 찾아보아도 없고

아이들 떠드는 소리마저 끊어진 지 오래

엎어지면 코 닿는 자리의 가게도 문을 닫았다.

늘 헐빈하게 비어 다니는 버스

타고 내리던 사람들 지키는 연쇄점

이젠 방수나 집수리 한다는 간판으로 바꿔달고

귀밑머리 새파란 새댁이 열었던 분식집

한 평이 채 될까 말까한 비좁은 곳

라면 국수 김밥도 말아 팔고

비 구죽죽이 오는 날은 노인네들 모여

정구지전 부쳐 막걸리로 주전부리도 했는데

문 닫고 어디로 갔는지 소식조차 감감하고

속절없이 물기 다 날아가버린 장작개비로

마흔 해 넘겨가면서 살고 있는 동네

 

-시집 『눈』 태산, 2023.

 

 


 

 

김석규 시인 / 눈물 봉헌

 

 

허락해 준다면 봄을 유예하려 한다.

삶이라는 이 쓸쓸한 흔적

모두 다 떠나가 버린 텅 빈 정거장에서

당신의 마지막 편지를 읽는다.

굽이 돌아간 길에 나직이 젖고 있는 봄비

다시 동빙한설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

구들목에 묻히고 싶다.

부엌에 물이 끓고 장작불이 아직도 타고 있을 것이다.

폐허가 다 되어버린 황량한 추억의 빗물자국

숙취 부석부석한 아침을 헤집어서

젓가락도 대지 않고 둘러 마시는 성주탕 한 그릇 아니 두 그릇

살아남은 자가 먼저 간 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눈물뿐

새들이 오고 꽃이 핀들 무슨 소용이랴

누군가가 봄을 조금이라도 붙들고 있어 준다면

당신의 마지막 모습을 아끼고 싶다.

세월이 질주해 가는 쓸쓸한 그늘

오랜 숙환의 인적기 묻어나는 제단 앞에

이 세상 가장 맑고 깨끗한 언어를 드린다.

 

 


 

 

김석규 시인 / 낙향을 꿈꾸며

 

 

그대 사는 마을의 햇살은 아직도 그렇게 가벼운가.

작은 풀꽃은 더없이 맑게 피어 요요히 가고

일찍 나온 낮달이 하염없이 앉아있는 콩밭머리

빈손을 툭툭 털며 흰 구름 날아오르는가.

낮은 지붕의 굴뚝마다 저녁연기 그리운

잊혀지지 않는다. 부엌의 삭정이 타는 불빛

청경우독의 이웃들이 나누는 한우물의 물맛과 함께

삼경이 가깝도록 도란도란 정을 포개고

주머니 속에 남은 성냥을 그어 별이 빛나는 새벽

풀섶의 이슬에 바지가랑이를 흠뻑 적시며

매롱이 눈뜨고 기다리는 가축들을 돌보러 나가는

그대 사는 마을의 햇살은 아직도 그렇게 가벼운가.

 

 


 

 

김석규 시인 / 풀밭

 

 

해 설핏하면 풀밭에 나가 뒹굴었다

힘없고 가난해서 정다운 풀잎의 마을

청솔가지 타는 연기 냄새

뿌리 쪽에서 숟가락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양잿물 먹고 죽은 사람의 울음소리도 들린다.

어두워오는 속에 하얀 이빨 드러나는

아직 한 번도 이름 부르지 않은 풀꽃

머리 위에 묻어 있는 노란 가루를 털어주며

이 세상 가장 귀중한 목숨

착하게 살아라. 오래 오래 살아라.

여윈 볼이라도 마구 비벼대고 싶은 저녁때

자전거 뒤에다 어머니를 태우고 가는 중학생도 보인다.

 

 


 

 

김석규 시인 / 회상의 숲

 

 

기억의 저편을 더듬어서 비에 젖은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름은 얼마 남지 않았었고 정장을 한 숲은 아름다웠다.

우기의 질펀함을 다 받아내기에는 너무 늦은 활엽수

그늘 아래로 일어서는 작은 길을 따라 쏘다녔던 날들

비에 젖으며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소리를 철벅거리며

체온의 날개를 비벼 축축한 육신을 건조시켜야 했던

생각난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로 피어오르던 안개

덩치 큰 나무들은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 빗물을 털어내고

동갑내기의 뱀들은 필생의 유업을 위해 옷을 벗어던졌다.

더 이상 가려줄 하늘이 보이지 않아 우산을 접을 시간

바다 가까운 마을에서는 굴뚝마다 저녁연기가 흩어지고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기다리는 처마 끝

푸줏간의 정육덩이보다 진한 선홍빛 등불이 걸린다.

근 한 달을 비에 씻긴 나무들의 체취로 범람하는 숲 속

무슨 소용 있으랴. 차오르는 어둠이 목을 친친 감는데

맨살 하얗게 드러내어 유영하던 숲은 매혹적이었다.

비에 씻긴 나뭇잎이 아니라도 전신에 푸른 비늘이 돋고

진한 수액보다 더 끈끈하게 묻어나던 점액질의 젊음

너무 아름다웠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영원하리라 믿었던

이제는 기억의 저편에서 비에 젖은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김석규 시인

1941년 경남 함양군 출생. 부산사대 미술과 졸업.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 졸업. 196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파수병" 당선. 1965년 "현대문학"에 청마 유치환 추천으로 초회 추천. 1967년 '삼천포 기행'으로 '현대문학' 추천완료로 등단. 부산시인협회장. 장기간 교직에 종사. 2004. 제20회 윤동주문학상. 시집: <파수병> <풀잎> <남강 하류에서>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