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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경덕 시인 / 내부 수리 중
오른쪽 다리를 다친 시누이 친친 깁스를 하고 목발로 걸어와
아픈 다리에 어서 낫도록 몇 자 적어달라는데
서슴없이 매직팬으로 써 내려간
“내부 수리 중” 박장대소에 시누이도 따라 웃는데
문득 “내부 수리”라는 말이 가슴을 친다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내 머리칼도 다 세는 그분이
지금 설계도를 꺼내놓고 부러진 뼈를 맞추고 계신 것이다
자칫 공사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으니 뼈가 굳을 때까지 조심히 걸으라고
“내부 수리 중” 공사 팻말 하나 깁스한 다리에 세워 두었다
-『생명과 문학』 2021. 제2호
마경덕 시인 / 공중무덤
새벽이 숲를 켠다 나뭇가지에 낀 어둠이 뿔뿔이 흩어지고 밤새 보름달에 접속한 하늘은 해상도를 높인다
잠시도 귀를 굶기지 않는 나무들 일찍 새 떼를 풀어놓고 새소리로 아침을 먹는다 숲이 낳은 새들 지난밤 둥지에서 충전한 목소리가 사방으로 방전된다
새를 타고 산 너머로 날아간 나무도 있다 물똥을 싸도 잎사귀서랍에서 벌레과자를 꺼내주는 나무는 새와 같은 핏줄이다
서쪽 능선이 서둘러 붉은 이불을 편다 공중의 길을 지우는 어스름 정시에 숲이 닫히고 빈 둥지가 불안하다
새들의 무덤은 공중에 있다
마경덕 시인 / 고래는 울지 않는다
연기가 자욱한 돼지곱창집 삼삼오오 둘러앉은 사내들 지글지글 석쇠의 곱창처럼 달아올라 술잔을 부딪친다 앞니 빠진 김가, 고기 한 점 넣고 우물거리고 고물상 최가 안주 없이 연신 술잔을 기울인다 이 술집 저 술집 떠돌다가 청계천 하류에 떠밀려 온 술고래들 어느 포경선이 던진 작살에 맞았을까 쩍쩍 갈라진 등이 보인다 상처를 감추며 허풍을 떠는 제일부동산 강가 아무도 믿지 않는 얘기 허공으로 뻥뻥 쏘아 올린다 물가로 밀려난 고래들, 돌아갈 수 없는 푸른 바다를 끌어 와 무릎에 앉힌다 새벽이 오면 저 외로운 고래들 하나 둘, 불빛을 찾아 떠날 것이다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섬에 닿을 수 있을지...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다 스크루처럼 씽씽 곱창집 환풍기 돌아간다
마경덕 시인 / 물컹한 돌
저 단단한 돌은 죽은 물고기 떼, 빙하를 따라 흘러온 암석의 파편 깨진 물거품, 바람과 파도의 부스러기 쌓이고 쌓인 부드러운 퇴적물을 공룡이 밟고 지나갈 때 물컹, 물컹, 육중한 체중이 찍혔을 것이다
뻘을 밟는 느낌이었을까 중생대 백악기의 발바닥에서 비릿한 냄새가 난다
짠물에 침식된 아득한 시간, 물컹한 것은 제 가슴에 발자국 본을 뜨고 있었다고 해안에 둑을 쌓고 뭍으로 올라와 증언한다
공룡을 버리고 뼈도 버리고 발자국만 품은 저 화석 그때 발을 빠뜨린 공룡은 발목을 들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깊은 어둠이 되거나 파도의 발길질에 사라질 하찮은 것이 이토록 오래 살아남을 줄 공룡은 짐작이나 했을까
익룡까지 키운 까마득한 힘으로 숨을 쉬는 돌
누가 역사인가 거대한 것들은 지구에서 사라지고 밟히는 것들만 살아남았다
저 물컹한 것이 증인이다
마경덕 시인 / 칼집
저 집이 고요하다 노련한 주인은 바람의 목까지벤 전적(前績)이 있다 팔을 휘두르던 무사(武士)는 끝내 집에 들지 못하고 칼만 제 집으로 돌아왔다 과업을 마치고 싸늘히 식은 침묵을 달아보니 사백년이다 저 잠을 깨우면 잠복한 살의(殺意)가 튀어나와 누군가의 목을 겨냥하리라 비명을 맛본 칼은 피맛을 잊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정확히 급소를 찾아낸 사내처럼 집이 열리면 단칼에 어둠의 목까지 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나서지 않는 칼 칼집도 제게 꼭 맞는 몸만 모신다 둘은 혈연의 관계, 더러 길을 놓치는 천형(天刑)도 있어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늙은 어미처럼 빈 칼집은 불안하다 칼날끼리 불꽃을 토하는 칼 미쳐 날뛰던 기운도 집에 들면 온순하다 칼을 달랠 수 있는 건 칼집뿐이다
마경덕 시인 / 씨옥수수
처마 끝에 매달린 마른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상으로 뛰쳐나갈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불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CJ 사보-생활 속의 이야기 (2003년 3,4월호)
마경덕 시인 / 봄이 일하는 보리밭가에 앉아
신월리 바닷가 끝없는 그 보리밭
봄이 먼저 취직한 삼월의 보리밭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가
멸치 떼처럼 반짝이는 바다를 건너온 봄이 일하는 보리밭가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녹색의 갯바람에 젖는 봄의 눈부신 머릿결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실업失業의 봄
그 보리밭이 나는 가장 아팠다
-월간 <시인>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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