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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주 시인 / 반짝여라 태풍아
태풍 전 장마라니, 장마 전 폭염이라니, 숨 가쁜 날 태풍을 맞이하러 아침 일찍 나섰어요. 바다는 고요했죠. 나는 바다의 짙푸른 영혼을 볼 때면 겁을 내다가도 햇빛에 부서지는 흰 살점을 보면 희망을 품기도 했죠. 막상 바다는 잠이 깊었죠. 물고기에게는 화향(花香)과도 같을 바다가 내게는 호접몽을 꾸는 듯 태풍의 눈에 들기도 하는 곳이죠. 아마도 이름을 지어준다면 마하(摩訶)가 어울리겠죠. 이런 시답잖은 생각으론 바다를 메울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보세요. 태풍은 곧 올 것이고 공간의 비틀림 한가운데 활짝 필 저 흰 연꽃을요. 자, 담을 기명(器皿)이 될 차례인데요. 제가 제대로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첩첩의 생각들을 무작정 걸었지요. 걷다 보니 바다만 남은 바닷가에 와 있더군요. 먼저 다녀간 개의 발자국만이 왔다 가는 파도에 지워지고 있었어요. 모래는 불에 탄 것처럼 검었지요. 그 이전의 이전을 걷는 것 같았어요. 밟을수록 달라붙는 모래에 생긴 상처 이후 마음이 좀 더 단단해졌어요. 맞아요. 주의는 아직도 고요했고 나도 아직 죽지 않았어요. 나는 얼마나 오래 혼자였던 걸까요. 내(我)가 없는 시간들이 마구 바다로 쓸려가는 걸 느껴요. 제발, 이번 태풍에 이 막막한 갈증이 해갈됐으면 좋겠어요. 얼마나 태풍을 닮으려고 안달했는지 또 얼마나 아파했는지 부끄러워요.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조금씩 용기를 내어서 다시 나를 빚어 볼게요. 앞으로의 시간에 좀 더 솔직해 볼게요. 바다가 거울처럼 반짝거려요. 궤도를 이탈할 태풍이 온대요.
안은주 시인 / 안부
너무 빨랐던 폭설이 세상을 후려치고 있었다. 폭설의 피는 새것같이 하얬다. 브레이크가 깊숙이 밟혔다. 무서웠지만 우린 내색하지 않았다. 눈이 울컥 삼나무 가지에서 떨어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다시 만나자 약속하고 헤어졌다. 철 지난 약속에서 너는 언제나 과잉으로 어렸고 나는 모질게도 늙어갔다. 쌓였던 눈이 점점 얼어갔다. 밀교 같은 폭설에서 눈사람 하나를 잃었다. 뽀드득, 뽀드득,
안은주 시인 / 그런 건 상관없잖아
새는 날고 싶어 하늘을 쳐다보았으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반짝이는 햇빛을 쪼아보았는데, 구름이 눈이 부시게 가슴 아픈 꿈을 좆아가는 것 같아서 날개로 구름을 후려쳤을 때, 구름의 꽁무니에서 언제인지 모를 잃어버린 깃털이 숨을 쉬고 있었고, 본연의 날갯짓으로 비쳐 바쁜 가운데 사랑에 대해 사랑으로 무용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 순간, 그 본연을 보는 침묵이 시선 넘어 날아 오르고, 희망에 불타던 날개를 짚고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꿈과 미소가 가쁜 숨을 쉬고, 알을 낳으면 그 알의 타원형에 맞춰 생각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고, 슬픈 계절 속에서 여백이 없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을 때, "이런, 개뿔!" 책상 위 매몰당한 집착들을 버려야 할지, 나아갈 수 없는 생각이 넘쳐났을 때, 새는 눈을 부릅떴으며 어느덧 제게서 떨어진 깃털을 시인하고 있었다.
안은주 시인 / 애인
습관처럼 눈썹을 뽑는 버릇이 있습니다. 눈썹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밤마다 이유 없이 나오는 기침은 대화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마치 딸꾹질같이 나오는 기침은 애인이 두엇쯤 있었다면 전해졌을 소식 같았습니다. 어지러움은 덤입니다. 나에게 제공된 세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침이 심해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덜 깬 꿈에서 작은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의자는 그렇게 낡아졌다. 이 문장만이 현실에 남아 가난하게 날 세상으로 끄집어냈습니다. 점점 의자로 채워지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그 후 하나의 고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내 천 개의 고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느새 의자 부자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지구의 벗이었던 명왕성이 퇴출된 이후 미열을 앓는 누군가의 애인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 눈에서 반짝이고 싶어졌습니다. 애인의 반짝이는 눈에서 이전까지 없던 첫 사물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밤마다 눈썹이 애인처럼 월담하듯 떨어집니다. 나는 기침과 기침 사이에서 자꾸 눈이 부셨습니다.
* 김승희- 달걀 속의 生의 역자 서문 중에서.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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