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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용숙 시인 / 공동경비구역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1. 11.
박용숙 시인 / 공동경비구역

박용숙 시인 / 공동경비구역

 

 

엘리베이터 가운데 둔

아파트 공동경비구역

 

남북의 문 열리고 예견치 않은

회담 성사될 때마다

열대야에도 찬바람 휑하다

애써 외면한 얼굴, 무표정한 근육

어색한 시선은 애꿎은 거울 겨냥한다

누가 이곳에

거울을 달아 놓을 생각했을까?

잠시 딴청 피우지만

매번 낯선 몇 년째 통성명 없는 앞집 여자의

장바구니와

피부와 옷차림새, 액세서리 슬쩍 훑어보며

유기농일까, 아닐까

순금일까, 아닐까

별별 생각 스친다

 

언제쯤 우리 무장 해제하고

봄꽃 따뜻이 피워낼 수 있을까?

 

-애지, 2024년 봄호에서

 

 


 

 

박용숙 시인 / 고려장

 

 

입추 말복 지나

집마다 고양이 눈 닮아가고 있다

 

한때는 장단에 맞춰

밤낮없이 좌우, 위아래로

엉덩이 씰룩거리며 요염하게 춤도 추었다

안방에 들어앉아 사랑 독차지하며

명성 굳건하게 지켜냈다

언제부턴가 조강지처 자리

신음조차 없는 밤 고양이 발바닥처럼

앙큼한 무풍년에게 내어주고

뒷방 전전긍긍하는 신세로 전락했지만

다시 찾아줄 날 기다리며

간간이 불어오는 대숲 바람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

 

오랜 기다림에 심장 멎고 목뼈 주저앉은 나를

쓰다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그깟 노잣돈 몇천 원이 아까워

CCTV 깜빡 조는 분리수거장 뒤편에

슬그머니 내다 버렸다

달빛마저 애써 외면하는 밤이었다.

 

 


 

 

박용숙 시인 / 멸치, 고래를 꿈꾸다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메타버스에는 널려있다지

먹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오늘도 홈쇼핑 최저가 핸드폰 결제

 

그래도, 태평양 가슴에 품으니

이까짓 편의점 아르바이트 서너 개쯤이야

하루 세끼 삼각김밥도 견딜 수 있어

바다 한가운데 은빛으로 빛나는 내 모습

날치 꽁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아

노는 물도 당연 다르지

옥션의 경매 정보나 쿠팡의 쿠폰도 팡팡 쌓이고

빌딩 몇 채도 내 이름 석 자로 빛나고 있지

이제는 겪을 일 없는 풍파

신의 가호란 말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 이놈 똥 뺄 것도 없겠네, 얼마나 못 먹었으면

 

달랑 소주 한 병으로 나를 깨운 거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저 아줌마는 모를 거야

내가 어떤 세상 꿈꾸는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술고래 말고

푸른 물결 헤쳐 나가는 대왕고래

가슴에 산다는 걸

 

정말, 고래가 될 수 있을까?

 

 


 

 

박용숙 시인 / 아버지의 신념

 

 

이빨 빠진 도장 한 번에

논배미는

영문도 모른 채 다른 주인 섬겼다

 

오라비 학자금 마련에

새벽 댓바람 고무신 종종걸음

대문 높은 집에 염치없는 손 내밀지 않았을 터

그 땅만 있었어도, 그 땅만 있었어도

귀 에는 바람 어머니 속 울어댔다

 

애써 외면했지만

아버지의 시선, 닷 마지기 논에 머물고

경칩 무렵 잠에서 깬 눈치 없는 개구리

아버지 속 시끄럽게 긁어댔다

 

읍내 농협에서 날아온 빚보증 독촉장에

아버지와 대작하던 고추장 바른 멸치가

더 붉게 울상짓던 날

사람이 먼저지 그까짓 땅이 대수냐 하시던

아버지 가슴도, 비워진 술잔도

지난해 가뭄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 되어 갔다

 

논배미 고무신 발자국마저 한낮의 장대비에

슬그머니 자취 감추어 버렸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박용숙 시인

충남 청양 출생, 2023년 애지신인문학상 등단, 현재 애지문학회 회원, 향적시 동인. 계룡시청 공무원.